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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정편 - 常棣亭(상체정) -

 

소재지 : 경북 영천시 고경면 파계리
건립연대 : 년(조선영조) 건립
건립자 또는 연고자 : 芝軒 孫漢樞(1664-1712), 菊圃 孫漢機(1668-1745)
건물의 입지 : 江海沿邊形
건물의 형태 : 단층의 평집
지붕 : 팔작지붕
건물의 모양 : 四角形
누정건물의 정면과 측면의 칸수 : 정면 - 4칸, 측면 - 1칸
건물 보존 상태 : 양호
문화재 지정 현황 :

 

 孫厚翼 作, 常棣亭記

普賢之山南騖爲雲住又翔而東南回示六七里聳而起復嬋娟楕衍而開梨之洞後列兄弟峰琴谷梧溪之水左右而逢于前是古孫氏芝軒菊圃伯叔先生之里而昆孫世之梓桑花木使人指點焉二公俱以讀書之士遊甁窩李先生之門得聖域可期之詡可謂一言決矣盖伯公優於德行而有陋巷之樂叔公長於文詞而有湖海之氣要其歸則皆儒門碩哲而合張宣公之知不知也衰世浮榮知非我貴而兄採山芝弟種籬菊藹然眞樂不獨天倫之人所同得也嘗搆趙君之茅而設楊氏之幔貯圖史而迎髦譽至今二百年餘有顔井溪田之感後孫因其宗子之遷舍直其屋而亭之扁之曰常棣以寓尊慕二公之義送其門子啓永命余以楣記豈以余爲可者哉其推同根之以也其推兄弟之義也遠矣豈敢辭諸噫今喬木根顚而一枝南北寒暄各異三秀靈芝欲何爲哉東籬舊菊更誰採爲又况亭子不可恃之物也賢昆之爲是役於今日者果能追二公之德行文辭而尋消息於金丹寓志節於露史耶洵如是也先生之聖域卽斯在矣而世世而莫如我兄弟雖無斯亭亦可也然道雖不依於物而亦必寓物而生焉是故性情爲固有之常而華之韡卾者詠乎物而興起之亭烏可己也古人雖遠舊物猶存異日者吾將仰賢山而看雲據梧樹而韻琴撫芝壁循菊逕而講兄弟之道於常棣扁下也 屠維單閼之淸明節 宗後生月城孫厚翼書


보현산이 남쪽으로 내달려 운주산이 되고 또 나는 듯이 달려 동남쪽으로 돌아보며 6,7리를 가서 우뚝 솟아 기복을 이루며 아름답게 길쭉하게 퍼져 이동을 열었고 뒤로는 형제봉이 늘어서 있으며 좌우로는 금곡과 오계가 흘러 앞에서 만나니 이곳이 옛날 손씨 지헌과 국포 두 형제 선생의 마을로 그 후손들이 대대로 고향을 삼으며 살아 노나무와 뽕나무와 화목을 사람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게 되었다. 두 선생이 모두 독서하는 선비로서 병와 이형상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성현의 경지를 기약하는 자랑을 얻으니 한마디 말로 결단할 수 있다고 하겠다. 대개 형은 덕행에 뛰어나 안자의 누항에 사는 즐거움을 두었고 아우는 문사에 뛰어나 호해에 노는 기운을 두었으나 그 귀취를 요약하면 모두 유가의 석인철사로 장선공의 알아주고 알아주지 아니함에 합당하다고 하겠다. 도가 쇠미한 세상의 뜬구름 같은 부귀영화는 내가 귀하게 여길 바가 아니란 것을 알고 형은 산에서 지초를 캐고 동생은 울타리에 국화를 심어 성대하게 참 즐거움을 누리니 홀로 천륜을 누리는 사람들만이 한가지로 얻는 바가 아니다. 일찍이 조군의 띠집을 짓고 양씨의 휘장을 설치하여 도서와 역사서를 비치하고 뛰어난 선비들을 맞이한 것이 지금까지 이백여 년이 되니 안자의 우물과 시냇가의 밭의 감회가 있도다. 후손들이 종손이 집을 옮기자 그 집을 사서 정자를 만들고 상체라고 편액을 거니 두 선조를 존중해 흠모하는 뜻을 붙인 것이다. 문중의 자질인 계영을 보내어 나에게 기문을 지으라 하니 어찌 내가 이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겠는가? 한 뿌리의 연고를 유추하고 형제의 정의를 미루어 생각해보니 아득히 멀기는 하지만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슬프다, 지금 교목의 뿌리가 넘어져 한 가지가 남북으로 나뉘고 춥고 더움이 각각 달라졌으니, 세 번 꽃이 피는 영지인들 무엇을 하고자 하겠는가? 동쪽 울타리의 옛 국화는 다시 누가 캐겠는가? 또한 하물며 정자는 믿을 수 없는 물건인데 어진 후손들이 오늘날 이 일을 하는 것이 과연 두 선조의 덕행과 문사를 추모하여 소식을 신선의 단사에서 찾고 지절을 정의의 역사에 부칠 수 있겠는가? 진실로 이와 같이 한다면 선생의 성역이 곧 여기에 있을 것이지만 대개 고인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으나 옛날 물건이 오히려 남아 있으니 다른 날에 내가 장차 보현산을 우러러 구름을 보고 오동나무를 근거로 거문고의 운치를 느끼며 지초가 핀 벽면을 어루만지고 국화가 핀 길을 따라 다니며 형제의 도리를 상체정 아래에서 강론하리라. 기묘년 청명절에, 종후생 월성 손후익이 짓다.

 

趙顯奎 作, 常棣亭記

永陽之北淑氣停萃山水之明麗園林之盤錯特爲東南殊勝之區而梨洞一曲孫氏世庄也門閭花石之排舖詩禮孝友之敦風世有聞焉而淸秀人物有如芝軒菊圃二公以文學行義幷美於一家所謂元李方之難也嘗就正於甁窩李先生之門熏被德敎得聞此學之有本退與兄弟聯床征邁造詣漸熟籩豆幃幔之間偃息談笑以盡天倫眞情之所發凡是莫如之樂無愧於周公常棣詩之旨義也南州人士至今籍誦不已凡爲兄爲弟者莫不以是勸勉是豈竊譽於鄕黨州里而能然哉盖有所本也是足以兼善廣敎於世而與時齟齬不見尙賓于王國託趣邱園燁燁者芝黃黃者菊貞孤韻致不與常卉凡草萎靡於風霜凌烈之天永世流芳而不歇矣炳龍慶睦甫軆念二祖兄弟相愛之義遂與宗君承睦復葺當日燕居寢室扁以常棣總若干棟堂室翼翼整齊梓桑左右交暎苟完矣苟美矣俛仰低徊覿彷彿於杖屨之聯翩若有聞於塤篪之迭唱風儀警咳之音容不暇謀惟而瞭然於心目之間矣如有登覽者或以烟霞雲物之勝槩求之則非斯亭之眞境也炳龍使其弟炳雲謁余而語曰不肖輩無敢撰述先世懿行而二祖友于之篤嘗有聞於家庭傳習矣恐久遠而忘忽也近倡常棣屋子粗效追慕之微誠請一言以記使吾祖宜兄宜弟之義永有辭於來後則庶斯亭之不朽也不侫瞿然而起辭曰僉君之爲是役可謂盡其仁矣何用否德萎言胎累楣顔無已則有一言居是堂也夙夜敬止法祖考之善行念祖考之典刑講詩禮敦孝悌諸父諸兄無有相失然後庶幾於軆先之道唯僉君子以是加勉哉常棣之華何其韡韡可以詠矣可以歌矣歌未闋而遂爲亭記 歲黃兎桐華節 巴山後人趙顯奎記


영천의 북쪽, 맑은 기운이 그쳐 모인 곳에 산수가 수려하고 원림이 우거져 특별히 동남지방의 특수한 명승 구역이 되었는데, 이동의 한 구비는 손씨가 대대로 살아온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는 꽃과 돌이 죽 널려 있고 시와 예절과 효도와 우애를 행하는 돈독한 풍속은 대대로 소문이 나 있는데, 지헌과 국포 같은 맑고 빼어난 두 선생이 계셔서 문학과 행의로써 한 집에서 아울러 아름다운 이름이 나니 이른바 진원방과 진계방의 난형난제와 같도다. 일찍이 병와 이형상 선생의 문하에 종유하여 도덕의 교육을 흠뻑 받아 우리 유교가 근본이 있다는 소리를 얻어 들었고 물러나 형제가 더불어 책상을 연하여 힘써 노력하니 조예가 저점 성숙해 갔다. 제기와 휘장의 사이에서 누워 쉬고 담소하며 천륜의 진정에서 우러나온 바를 다하니 무릇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즐거움이 주공께서 상체시에서 읊은 뜻에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다고 하겠다. 영남의 선비들이 지금까지 자자하게 칭송함을 그치지 아니하니 무릇 형되고 아우된 사람들에게 이 때문에 권면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을 어찌 향당과 주리에서 명예를 도적질하여 능히 그러한 사람이라고 하겠는가? 대개 근본으로 삼는 바가 있어서 이것이 족히 세상에 겸선을 널리 가르칠 수 있을 것인데 시대가 어긋나서 나라에 부름을 받아 벼슬하지 못하고 취미를 자연에다 의탁하니 빛나는 것은 지초요, 누런 것은 국화인데 곧고 외로운 운치가 평범한 꽃과 풀이 바람과 서리가 매섭게 휘날리는 날에 모조리 스러져 버리는 것과 달라 영원토록 향기를 흘려서 쉬지 아니하도다. 병룡과 경목 노인이 두 선조가 형제간에 서로 사랑하던 뜻을 본받고 생각하여 드디어 종손인 승목과 함께 다시 당년에 평상의 거처와 침실을 수리하고 상체라고 편액을 거니 모두 약간 동의 건물이 되었다. 마루와 방이 익익하게 정제되고 노나무와 뽕나무가 좌우에 서로 비치니 조금은 완비가 되고 조금은 아름다워졌도다. 굽어보고 우러러 보며 배회하면 두 선조께서 나란히 지팡이를 이끌고 다니시던 모습을 보는 듯하고 형제간에 피리를 갈마들어 연주하는 소리를 듣는 듯 병룡이 아우 병운을 시켜 나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불초한 무리들이 감히 선대의 아름다운 행적에 대해 찬술한 것이 없어서 두 선조의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였던 것을 일찍이 가정에서 전습했다고 들은 적이 있을 뿐이므로 세대가 멀어지고 세월이 오래된 뒤에는 잊어버릴까 두려운지라, 근래에 상체정을 세워 추모하는 작은 정성을 조금이나마 바치고자 하여 한마디 말로써 기문 지어줄 것을 청한다. 가령 우리 할아버지께서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던 뜻이 영원토록 뒷세상에 보잘 것 없는 내가 두려워하며 일어나서 말을 하기를 “여러분들이 하는 이 일은 그 어진 것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으니 어찌 부덕하고 힘없는 말을 하는 사람이 상체정의 편액에 누를 끼치는 일을 하겠는가?” 그러나 그만두지 않고 굳이 한마디 말을 한다면 이 방에 거처하는 사람들은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공경히 조상의 선행을 본받고 조상의 법도를 유념하여 시와 예절을 강의하고 효도와 공경함을 돈독하게 하여 부형들이 서로 실수한 것이 없고서야 거의 선조의 상체의 꽃이 어찌 그리 활짝 피었는가? 시를 읊조릴 수 있고 노래를 부를 수 있으니, 노래를 끝마치지 아니하고 드디어 상체정의 시문을 짓노라. 기묘년 동화절에, 함안후인 조현규가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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