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경북 군위군 군위읍 건립연대 : 1895년() 건립 건립자 또는 연고자 : 건물의 입지 :
江海沿邊形 건물의 형태 : 단층의 평집 지붕 : 팔작지붕 건물의 모양 : 四角形 누정건물의 정면과
측면의 칸수 : 정면 - 3칸, 측면 - 1칸 건물 보존 상태 : 양호 문화재 지정 현황 :
亭在赤羅治北十里中山之下籠巖之坊慕南溪李先生而作也先生精舍舊在南溪之上爲晩年講道之所先生旣歿晜仍移居籠巖而精舍亦世遠而墟矣李氏諸君子惕然相謂曰南溪之舊址翳然松院之俎豆己撤矣維此籠巖一區曾亦先生杖屨芬芳之地而姓孫之居亦爲累世盍起一棟宇用寓羹墻之慕乎僉曰諾乃相地而建若干架其制中堂而兩夾爲室前退而楹足以備暄凉而管山水也遂扁其楣曰淸風盖取先生賦歸時淸風駄歸之語也於乎仕而受祿古之道也而五馬歸槖只駄得淸風一陣則其廉介淡泊比諸古人琴鶴之裝己過矣豈非後人之所當景慕者乎盖先生以謹厚之姿篤實之學內而有松塢兄五峯叔之賢而爲天倫知己外而得西厓柳先生爲賢師鄭文莊張文康爲道交相與講質而勤勉之者亶在於愛親敬兄忠君惠民之道也是以臬司以孝友薦朝廷逮夫島寇內搶慷慨憤勵聯盟義幕而軍伍整肅職掌屯田而犒饗豊衍分憂民社而黎庶安集盖其至行于家豊功于國者莫非平日學文之力而大亂稍平巧侫搆誣則便脫然舍歸悠然作東岡○老然則湖海淸風不但爲先生駄歸之物而己在於先生襟韻之中也使世之顚冥富貴者得聞先生之風則豈不能赧然悔耻知所以廉介乎吾知斯亭之作不亶爲李氏慕先之地抑可爲世敎之勸也夫亭旣落後孫錫均鉉錫問記於相圭顧耄弊不堪而窃惟吾先子雪齋府君銘先生之碣拊念先契不敢恝敬書如右以塞慈孫之請至若山川景物之美登覽者當自得之煩不記焉
丁酉 重陽前 五日 後學 永嘉 權相圭 謹書
정자가 군위(赤羅)의 군청에서 북쪽으로 십리되는 中산의 아래 농암의 고을에 있는데, 남계 이선생을
위하여 지은 것이다. 선생의 정사가 옛날 남계 마을의 위에 있었다. 만년에 도를 강론하던 장소로 삼았으나, 선생이 이미 돌아가시고 자손이
농암으로 이사하여 살게 되자, 정사도 역시 세대가 멀어지면서 폐허가 되었다. 이씨 문중의 여러 군자들이 슬퍼하면서 서로 말하기를, “南溪의
옛터가 숨겨져 알 수 없게 되고 송원의 제향도 이미 철거되었으니, 오직 이 농암의 한 구역도 일찍이 역시 선생께서 지팡이를 끌고 거닐며 향기가
담긴 지역이며, 자손이 살아온 지도 역시 여러 대가 지났으니, 어찌하여 집을 한 채 지어 국그릇이나 담장을 보고도 사모하는 마음을 붙이는 곳으로
삼지 아니하리.“하였더니,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그렇다.”고 하였다. 그제야 땅을 상보아 몇 칸짜리의 집을 지었으니, 그 제도는 가운데가
당이요, 양쪽에는 협실에 실을 두고, 앞을 물리어 기둥을 하니 충분히 따스함과 서늘함을 갖추었고, 산수를 주관하였더라. 드디어 그 현판을
「청풍정」이라 하였으니 대개 선생이 읊으신 「돌아갈 때는 맑은 바람을 싣고 돌아간다」고 한 말에서 따온 것이다. 아! 벼슬을 하면 녹을 받는
것은 옛날 의도이다. 고을 원이 돌아갈 때에 가방에 다만 맑은 바람 한수레만 얻어 싣고서 돌아왔다면, 그 청렴하고 깨끗하고 담 박함은 옛
사람들이 금학(琴鶴)의 행장(行裝)과 비교하여도 이미 능가하였으니, 어찌 후인인들 마땅히 우러러 사모할 바가 아니겠는가. 대개 선생께서는
근후(謹厚)하신 자질과 독실하신 학문으로 안으로는 송오공 형과 오봉공 숙부의 어짐이 있어서 천륜으로 자기를 알아줌이 있었으며, 밖으로는 서애
류선생의 어진 스승을 얻어, 정 문장공과 장 문강공과 도의의 훈육을 받아 서로 더불어 강론하고 질문하면서 권면하였던 것은 오로지 어버이를
사랑하고 형을 공경하며 임금께 충성하고 백성에게 고마움을 주는 도뿐이었다. 그러므로 현감이 효우를 들어 조정에 그를 천거하였으며, 왜구가
쳐들어옴을 당했을 때, 비분강개하여 연이어 의병장에 맹세하니 군 사들의 대오가 정숙하였으며, 둔전을 맡아서 보니 군사들의 음식공급이 풍부하였고,
백성과 사직에 걱정을 같이 나누니 여민과 서민들이 편안하게 모여들었으니, 대개 그가 가정에서의 지극한 행실과 국가에서의 풍성한 공훈이 어느 것
하나 평일에 학문을 한 힘이 아닌 것이 없었으며, 대란이 점차 평정되자 교묘하고 아첨한 자가 무고를 하자 문득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지듯 버리고
돌아와서 태연하게 동강의 편안한 노인이 되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호수나 바다의 청풍만이 비단 선생께서 싣고 온 물품이 될 뿐만이 아니고,
선생님의 마음씨나 인품 가운데도 있었으니, 세상에 부귀에 쏠린 자들이 선생의 풍모를 얻어서 듣게 된다면, 어찌 능히 부끄러운 듯이 후회하고
부끄러워하면서 청렴하고 깨끗한 바를 알게 되지 않겠는가? 나는 알겠노라. 이 정자를 지은 것이 오로지 이씨가 선조를 사모하는 지역이 될 뿐만이
아니라, 아마도 가히 세상의 교육을 권함이 될 것임을. 대저 정자를 이미 낙성한 뒤에 후손인 석균과 현석이 기문을 상규에게 문의하였다.
돌이켜보니 늙고 쇠약하여 감당하지 못하겠으나, 가만히 생각하니 우리 아버지이신 설재부군께서 선생의 묘갈명을 지으셨으니 선친의 계호를 더듬어
생각하니 감히 괄시할 수 없어서 공경히 오른쪽과 같이 써서 자손들의 요청에 가름하였으며, 가령 산천이나 경물의 아름다움에 이르면 올라가서
관람하시고 마땅히 저절로 터득할 것이므로 번거롭게 기록하지 아니 하노라. 정유(1897)년 중양절의 닷새 전에, 후학 안동 권상규가 삼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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