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영양군 영양읍 현리 건축 : 1655년(효종
6) 英山書堂 창건, 1683년(숙종 9) 현 위치로 이건․서원으로 승격, 1694년(숙종 20) 사액, 1871년(고종 8)
훼철, 2018년 복원됨. 배향인물 : 이황(李滉), 김성일(金誠一) 배향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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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영산서원은 지방
유림의 공의로 1655년(효종 6)에 영산서당(英山書堂)으로 창건하였다. 1683 년(숙종 9)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移建)하면서 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1694년(숙종 20)에 사액(賜額)되었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1820∼1898)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毁撤)된 뒤 2018년 복원되었다. 당시의 경내 건물로는 사우(祠宇)·강당(講堂)·내삼문
(內三門)·외삼문(外三門)·동재(東齋)·서재(西齋)·전사청(典祀廳)·주소(廚所) 등이 있었 다고 한다. 창건 당시에는 이황(李滉)의 위패를
봉안하였고, 사액서원이 된 후 김성일(金誠一)을 추향(追享)하였다.
[참고1]
英山書院은
1638년(戊寅)에 세운 영산서당을 1655년(孝宗 6년 乙未)에 석계 이시명 선생이 당장으로 있을 때 서당을 서원으로 승격시킬 것을 주창하여,
서원이 되었다. 그 때 영산서당을 일부 수리하고 후면에 묘우만 새로 세우고 서당은 종전의 것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 때 영산서당에 보관된 서적
재산까지 서원으로 인계하였으며 숙종 20년(甲戌)에 사액하였다. 그러나 서원으로 승격된 뒤에도 종전과 같이 춘추로 講信은 물론 학자의 춘추 혹은
삼동 講學과 매월 초일일 講會는 종전보다 규모가 커졌다. 서원에 有司 또는 院任 院長을 선임하여 강회 때에는 반드시 城主[현감]와 敎官 또는
학우의 講官으로 유사와 같이 회합, 사서와 近思錄 등을 강론하여 그 뜻과 비결을 배웠다. 본군에는 복현될 때까지 향교가 없었으므로 향내 선비들의
修學處로는 영산서원 뿐이었으나 숙종 9년에 복현이 되고 영산하에 관아를 영건하고 객사를 신축할 때 서원의 위치가 그 중간에 있어 관사가 가깝고
지세가 본래 협소하여 한적하지 못하고 건물이 퇴락하므로 부득이 현동으로 이건하게 되었다. 이건한 연대는 詳考할 수 없으나 복현한 1683년(숙종
9년 癸亥)에 서원으로 승격한지 28년째이니 이 때를 전후하여 이건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새로 세운 서원은 마루와 행랑채가 훨씬 넓고 시장과
떨어졌으며 背山臨水하고 앞에는 층암절벽의 경치가 있으며 강이 있어 학도의 수양과 공부하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이 서원에는 主享으로 文純公 退溪
李滉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從享으로는 文忠公 鶴峯 金誠一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춘추로 향사를 지냈었다. 퇴계 선생은 주자학을 집대성한 우리나라의
성리학자인 대유학자이며 학봉 선생은 영산서당 창건에 공헌한 淸溪 金璡 선생의 4자로서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일본에 수신사의 부사로 갔던 학봉
김성일 선생이며 퇴계 선생의 수제자이다. 이 서원에서는 두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享祀를 지내 내려오다가 1871년(高宗 8년 辛未)에 대원군
서원철거령이 공포되어서 철거되고 현재는 옛터만이 남아있어 서원터라 전해 내려오고 있다. 『英陽郡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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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陽英山書院移安祭文
英陽一隅, 密邇宣洛, 舊無祠宇, 而寓羹墻, 秉彛所同, 咸願報事, 維爼豆享, 於乙未冬. 惟急其成, 不暇詳擇,
仍故學舍, 作廟增修, 處地高寒, 側峻騰露, 曾未卅載, 弊已難勝, 不合妥靈, 且妨典守. 百爾籌度, 宜莫如遷, 爰卽縣東, 經營數歲, 今幸就訖,
奧衍寬閒. 涓吉移安, 有侐其廟. 玆率故典, 奠以告虔. 以鶴峯先生金公配神從享, 惟靈鑒臨, 永寧無斁. 謹告.
한쪽 땅 영양은 예안이나
낙동강과 매우 가까워 옛날에는 사당에 제사지내며 祭需를 올릴 데가 없었지만 떳떳한 아름다움 모두 같기에 제사 올리기를 모두다 원하였다. 마침내
제향을 올리니 이때가 을미년 겨울이다. 오직 급히 하다 보니 상세히 살필 여유가 없어서 이에 옛 學舍를 사용하여 廟宇를 增修하였다. 지대가 높고
차우며 옆의 산이 높아 이슬에 자주 젖는 관계로 삼십년을 지나지 못하여 폐허가 됨을 막을 수 없을 정도였기에 神靈을 모시기에 합당하지 못하였을
뿐더러 또 맡아 지키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의논을 모아서 마땅히 옮기기로 하였다. 마을의 동쪽으로 옮겨서 일을 한 지 몇 년만에 오늘 다행히
마칠 수 있었으니 그 안이 널찍하면서도 한가하다. 길일을 택하여 옮겨 봉안하니 廟宇가 조용하다. 이에 앞선 예에 따라 제사하며 고합니다. 鶴峯
金公을 함께 배향하니 神靈께서 강림하여 살피어 영원토록 해 주십시오. 삼가 고합니다.
禮安의 옛 이름이 宣城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宣을 따왔고, 洛은 낙동강을 가리킨다.
英山書院移建上梁文
側埈騰露之可虛, 勢將擇址而移卜, 壞陋傾圯之有漸, 事合易材而改爲, 肆遵南康按故之儀, 聿追春秋修學之義, 玆申立院之旨,
庸述尙德之方. 恭惟退溪李先生以溫良愷悌之資, 篤明誠敬義之學, 蓍龜邦國, 大哉匡君化民之猷, 喬獄儒林, 至矣繼往開來之業. 亦惟鶴峯先生金公,
禀剛方正直之氣, 受欽恭祗栗之銘, 儼笏臺端, 凛凛有犯無隱之操, 張旃海外, 卓卓專對不辱之才, 自丹扆旣勤宣額而褒崇, 維靑衿亦爭立祠而尊尙.
顧惟英陽僻壤, 幸爲安禮鄰邦, 密邇陶山, 欽仰慕悅焉從昔, 經履鶴老, 稱思誦說於如今. 高山景行, 旣同秉彝之攸[交子] , 盛德至善,
固宜沒世而不㤀. 雖孕靈匪屬於玆鄕, 而精廬獨闕於斯土, 載謀蘋藻之薦, 式遄妥侑之期. 爰卽蕪沒之宮墻, 增修傑渠之厦屋, 爲士子依歸觀感之所,
寓父老羹墻嚮慕之忱. 肅肅齋房, 庶幾絃誦之不絶, 翼翼廟宇, 佇見肹蠁之無竆. 第緣仍舊便宜, 不念永久之計, 惟耽目前爽塏, 殊失審擇之規,
經營未三十年, 患害難一二數. 玆焉廢縣之側, 卜取故學之墟, 體勢周遭, 允合儒宮祠廟之攸置, 境落淸邃, 端宜藏修皷篋之所於, 抛棄荒榛, 鎻寒烟者久矣,
芟闢菑翳, 輦糞壤而新之. 列峀當楹而拱瓌, 雲嵐舒卷, 平川繞檻而襟帶. 灣漪淪漣. 坐對潛思, 縱歉黙契乎妙道, 登臨發歎, 莫不慨想於遺風. 白石靑雲,
豈無趣味之同得, 光風霽月, 別有消息之眞傳. 奧惟白鹿紹修之創開, 實出紫陽退陶之深意, 爲已敦典, 盍觀揭壁之規模, 飭行謹言, 請考遺沈之尺牘.
尊其人, 則師其道, 慕其德, 宜率其倏. 眞知力行, 克遵窮理修身之訓, 篤信謹守, 當存奉刹報佛之心. 游息燕閒, 不係州家之程督, 道義磋切,
豈專文字雌黃. 鳩材僝功, 蓋出一方之輿願, 改卜移建, 要皆羣彦之僉謀, 幷力齊心, 非若道傍之築室, 爭趨共赴, 寧有澤門之興謳. 乃使撲地闤闠之㕓,
遂成拱極高明之址. 冠屨莘莘, 威儀棣棣, 宛若親見於當年, 靑山峨峨, 流水洋洋, 相期永存於來世. 聊抽短韻, 用助升梁.
抛梁東
旭日朝朝射棟紅 直待纖雲掃卷盡 分明臨照皎如衷
抛梁西 簷端微月入簾低 箇中珍重難言妙
浮念澄時百體齊
抛梁南 雲影天光共一潭 更有源泉來混混 暮江蒼壁意中含
抛梁北
挹取虛危天漿液 看彼牛山萌孽生 驗玆夜氣良心息
抛梁上 赫赫明明及爾王 俯仰若爲不愧心
明誠偕進敬維相
抛梁下 脚踐平塗方免罅 言行待夫寡悔尤 許君然後行夷夏
伏願上梁之後,
戶說詩書, 家談仁義, 請子弟期做遠器, 從事博約之塗, 而父兄永保淳源, 莫羡騰之早, 要使山荒之域, 變爲文獻之區.
옆 줄기 우뚝 드러나
터로 할 만 하기에 형편은 장차 터를 택하여 자리를 잡으려는데 무너 지고 기우는 누추함이 점점 더하였으나 하려는 일이 이치에 맞으므로 쉽게
자재를 구하여 고쳐 세웠다. 이에 南康 옛 일의 예 대로 마침내 봄가을로 학문을 닦는 규칙을 따르고 이에 서원을 세우는 뜻을 늘어놓으니 어찌
덕을 숭상하는 방법을 말하지 않으랴. 오직 퇴계 이선생께서 온화하고 진실하며 너그러운 자질로 誠敬義의 학문을 독실히 밝히시 어 나라의
운수를 점치시니 크도다! 임금을 바로잡고 백성을 교화시킨 길이여; 儒林에 우뚝 하시니 지극하도다! 옛날을 이어 내일을 여신 학문이여. 또한 학봉
김선생께서는 강직하고 바른 기운으로 공손히 가르침을 받으셨다. 의젓하고 단아하신 자태는 늠름히 범할 수도 없 고 숨길 수도 없는 기품이었고
외국에까지 깃발을 펼쳐 우뚝이 바로 대할 뿐 욕보일 수 없 는 자질이셨다. 임금께서 친히 보시고 사액을 내리셔서 칭찬하여 높이시니 푸른 도포
날리 는 선비들이 또한 다투어 사당에 서서 높이 우러른다. 생각해보면 英陽은 한쪽에 치우친 땅인데 다행히 安禮과 이웃해 있다. 陶山과
가까이 있어 서 흠모하고 우러르며 옛날을 따를 수 있고, 학봉 노인께서 지나시던 곳을 지나며 오늘도 같이 읊으며 생각할 수 있다. 높은 산과 큰
길은 이미 모두가 아름답게 여기던 바요 성대한 덕과 지극한 선은 진실로 마땅히 세상이 다해도 잊을 수 없는 것이다. 비록 神靈께서 이 마 을에
속하는 것은 아니지만 精舍가 유독 이 땅에만 없으니 이제 제사를 올릴 의논을 하여 예에 맞게 서둘러 온당한 약속을 잡았다. 이에 황무해진 궁벽을
없애고 멋진 집을 고쳐 지 어서 선비들이 귀의하여 돌아보고 느끼는 곳, 父老들이 제사와 제향을 올리는 정성을 드릴 수 있는 곳으로 삼는다.
엄숙한 齋室에서는 공부하는 소리가 거의 끊이지 않고, 나는 듯한 廟宇는 우두커니 바라보며 감격하기 그지없다. 다만 옛 건물을 편안히
이용하기만 했을 뿐 멀리 내다보는 계획을 생각하지 못하고 다만 눈 앞의 상쾌함에 빠져 제대로 살피는 것을 놓쳐버렸다. 그래서 일을 마친 지
30년도 되지 않 아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에 지금은 폐쇄한 縣府의 한쪽에 옛날 학교 터를 잡고 지세를 두루 살펴보니 진실로
儒宮과 祠廟를 세우기에 합당하였다. 경내가 한쪽에 떨 어져 있고 맑고 깊어서 藏修하며 학문을 닦을 장소로 적합하였으나, 버려두고서 잠궈 두고
세월을 보낸 지 오래라 풀을 베어 내고 지저분한 것들을 날라 새롭게 했다. 재목을 늘어놓 고 기둥에 합당하게 재료를 준비하니 구름과 아지랑이
펼쳐지고 평야와 냇물이 쭉 둘러 감 기니 물굽이 감싸 흐른다. 마주 앉아 잠잠히 생각하니 오묘한 도가 묵묵히 떠오르고, 산에 올라 탄식하니
남기신 가르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흰 바위 푸른 구름 어찌 趣味로 함 께 얻은 것이 아니며, 빛난 바람 갠 달 따로 참 전함을 없앰이
있으리오. 생각건대, 白鹿서원·紹修서원이 처음 만들어짐은 진실로 紫陽과 退陶의 깊은 뜻에서 나온 것이다. 자기를 위한 학문[爲己之學]을
기준으로 하니 어찌 벽에 걸린 원규를 보지 않을 것 이며 행동과 말을 삼가 조상이 남기신 한 끝을 따르리로다. 그 사람을 높이면 그 도를 스승
삼는 것이요 그 덕을 흠모하면 그 조목에 따르는 것이 마땅하니, 앎을 진실로 하고 힘써 행 하여 이치를 궁구하고 몸을 닦는 가르침을 따르며 信을
도타이하고 삼가 지켜서 절에서 부 처를 받드는 것 같이 해야 할 것이다. 노닐며 한가히 쉬는 것은 관아의 감독과 관계가 없고 道義로 서로 갈고
닦는 것은 어찌 문자에만 얽매이겠는가. 재목을 갖추고 공을 모으는 것은 대개 모두가 한마음으로 원하는 것이었는데, 터를 고치고 옮겨 짓는 것은
여러 선비들의 공 통된 의논이 필요하였다. 힘을 모으고 마음을 함께 함은 길옆에 집을 짓는 것과 같지 않았 고 다투어 함께 달려옴은 澤門의
興謳가 있었다. 그렇게 하니 이에 좋지 못한 땅이 널찍한 거리와 같이 되어 마침내 높고 밝은 터가 이루어졌다. 사람들 끝없이 이어지고 위엄 있는
자태가 널리 미침을 이 때에 몸소 볼 것이며, 푸른 산 높고 높으며 흐르는 물 도도히 흘러 가니 내세까지 영원토록 함께 할 것이다. 우선 짧은
운을 내어 대들보 올림을 돕는데 쓴다.
어기야 동쪽에 떡 던지니 아침해 우뚝 솟아 용마루 붉게 한다 가는 구름까지
다 없애길 기다려 속마음 까지 환히 밝히리라
어기야 서쪽에 떡 던지니 처마 끝 은미한 달 주렴 안에 들도다
그 가운데 참된 보배 말로 하기 오묘하니 뜬 생각 맑은 때 온 몸이 가지런하다
어기야 남쪽에 떡 던지니 구름
그림자 빛난 하늘 연못과 한가지로다 다시 근원 있어 도도히 흐르나니 저문 강 푸른 벼랑 뜻을 머금었도다
어기야
북쪽에 떡 던져라 허공을 움켜 하늘 음료 마시리라 저 牛山에 싹이 나는 것을 보니 밤 기운이 진실로 마음에 좋음이
징험되누나
어기야 위쪽에 떡 던져라 빛나고도 밝아 왕성하게 되리라 하늘과 땅에 부끄러운 마음 없으려는 듯
밝은 정성으로 함께 나아가 서로 공경하도다
어기야 아래쪽에 떡 던져라 진흙을 밟고 밟아 틈이 없게 되리라
言行은 어른 기다려야 허물이 적게 되니 君을 허락한 후에야 小中華 행해지리
바라건대 들보를 올린 후에, 문마다
詩書를 읽고 집마다 仁義를 논하며, 子弟를 청하여 먼 훗날 그릇 되길 바라며 博約한 길을 가는 데 힘썼으면 좋겠다. 父兄은 영원토록 순수한 근
원을 보존하여 일찍이 높은 자리 오르는 것을 부러워하지 말아서 이 황무한 땅을 변화시켜 文獻의 지역으로 바꾸어 주었으면 좋겠다.
원문에서, 두 글자가 합해져서 한 글자로 되어야 하나 그런 문자가 없어서 우선 [交子]라고 표시해 둔다.
英山書院退陶鶴峯兩先生奉安祭文
孔孟正軌 孔孟의 바른 길 洛建是鉥 낙동강 가에 전해졌으나 寥寥久哉 세월이 오래되어 皇蹃卼臲 위태로울 때에 象山大拍 육상산의 학설 크게 치고 王陳紺起 왕진의 이단 학설 고쳤도다 不絶如線 선처럼 가늘게 이어질 뿐 止派之骫 유학의 발자취 그치게 되었어도 魚目混珍 魚目이 보물과 섞여 있으니 孰距楊墨 누가 양주·묵적을 막을 것인가 中州如此 중국도 이와 같은데 矧惟東國 하물며 우리나라랴 懿哉先生 아름다우시도다 선생이여 隻手障瀾 한 손으로 이를 막으시며 規步矩趨 법된 걸음 걸으셔서 指南新安 남쪽 新安을 가리키셨도다 體認中正 中正을 體行하시고 上下鳶魚 상하로 오묘히 실천하셨도다 斯世何忘 이 세상 누가 잊으랴 時應安車 때에 따라 수레를 편히 타시어 聖學進圖 임금님께 星學十圖를 올려 가르치셨고 原廟釐序 原廟를 고치시고 幷泮敎曙 함께 학교에서 가르치셨도다 闤闠倫敍 저자에도 윤리를 행하니 魯幾一變 魯나라처럼 거의 변했도다 家家禮讓 집마다 사양의 예가 있고 進退有道 나고 물러남에 도가 있도다 亦非長往 또한 멀리 가지 않아도 處家何樂 처하는 집마다 즐거웠도다 得英才育 英才를 얻어 길러서 戶屨齧趾 지게문이 다 닳았다 如飮滿腹 물만 마셔도 배부른 듯 했으니 何理不叩 무슨 이치든 묻지 않으며 何疑不釋 무엇인들 의문을 풀지 못했으랴 蔚爲儒宗 우뚝이 儒宗이 되셨도다 斯文大闡 斯文이 크게 열려 從享聖廟 聖廟에 從祀하도다 四賢竝興 四賢 나란히 일어나 外而俎豆 조정 밖에서도 향사를 올리려고 南北競先 南北이 앞을 다투며 眷彼英山 저 英山을 보았도다 眞城與壤 참으로 좋은 땅에 始今建學 비로소 오늘 서원 세우니 亦旣靡嚮 또한 이미 이를 향하였다 不謀而同 의논하지 않아도 한마음이기에 輪粤敞朗 수레 소리 이어지도다 冥尊師處 스승이 머물던 곳 높이니 如奉函丈 스승을 실제 받드는 것처럼 하도다 粤惟鶴峯 우리 鶴峯선생은 若孔游夏 공자 문하의 자유나 자하와 같도다 變化氣質 기질이 변화함은 實賴親炙 참으로 친히 가르치심에 힘입음이라 胾許我嚌 우리에게 그 맛을 봄 허락하시며 最深朱書 朱書를 가장 깊이 살피셨도다 浸灌一唯 오직 한 가지에만 힘을 써서 依歸自初 벼슬하는 뜻 유지하셨도다 昔胡豹剛 전에 그리 사납더니만 今佩其柔 오늘은 부드러움 두르고 있고 昔胡夷隘 전에는 오랑캐처럼 좁더니 今德宇休 오늘 덕스런 그릇 편안하도다 出而事君 나가 임금을 섬기되 不欺爲符 속이지 않고 신의 있게 하셨도다 蠻貊服節 오랑캐를 절개로 복종시켰고 創殘張弧 전쟁 나자 활을 잡아 盡瘁媒疾 온 힘 다해 병이 들어서 星隕奈天 별이 떨어지니 어찌하리오 惟此名區 오직 이 유명한 땅은 實供兩賢 진실로 두 先賢을 받들도다 日月北峙 日月이 북쪽에 우뚝하고 川源涌東 시내 근원 동쪽에서 용솟음치도다 至今草木 지금까지 초목에도 餘輝不窮 남은 찬란함 끝이 없도다 得直其地 곧 이 땅을 얻어 揭虔之卽 경건을 내세우며 巍然當座 우뚝히 자리를 잡으니 師道卓卓 師道가 우뚝하도다 門人爲配 門人이 짝을 이루어 古禮敢易 옛 예를 따라서 縫掖于于 정성스레 하니 芬苾郁郁 그 향기 성대하고 豆籩孔嘉 제기가 매우 아름다우니 鑽仰不替 우러름 끊이지 않으리라 庶幾鑑假 바라건대 굽어보셔서 歆于世世 영원히 흠향하소서 英山書院春秋享文
[退溪先生] [퇴계선생] 嫡傳雲谷 雲谷에서 衣鉢을 전해 吾道以東 이 동쪽에 도를 심었네 功存後學 그 공이 후학에서 나타나니 享祀永豐 영원토록 享祀하리
[鶴峯先生] [학봉선생] 維立不猗 좋지 않은 때에 일어나 義以身酬 몸으로 義를 다했도다 刳肝奏疏 온 몸을 다한 충성 照映千秋 영원히 빛나리라 英山書院奉安文
山河間氣 山河 빼어난 기운 받아 五百名世 오백년만에 名儒 나셨도다 潛心正學 正學에 마음을 두고 力踐妙契 妙契를 힘써 행했도다 涪翁嫡統 정자의 적통을 잇고 考亭正脈 주자의 바른 맥을 이어 攘斥王陳 왕씨, 진씨 이단학설 배척하고 抵排陸禪 육씨의 이단 禪學 물리쳤도다 辨異承聖 이단을 분별하여 聖學을 이었으니 功豈禹下 공이 어찌 우임금의 아래이랴 山頹旣久 산이 기운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尙有遺化 남긴 교화 오히려 남아 있어 俎豆崇報 제향을 올려 높이고 보답함은 實徧南土 진실로 온 남쪽 땅 전부로다 念此海邑 이 영양 땅은 側近東魯 동쪽의 노나라 땅인 안동과 가깝지만 縟儀獨闕 제향을 올리지 못했으니 責在吾黨 책임이 우리에게 있도다 矧伊英院 하물며 이 영산서원은 鶴峯所創 학봉 선생이 세운 곳으로 地合藏修 땅이 머물러 공부하기에 맞고 工專窮格 공을 들임은 오직 격물치지에 있었다 遂立溪雪 마침내 퇴계 문하 제자가 되어 親承誘掖 몸소 가르침을 받아 生旣升堂 살아서 이미 당에 올랐으니 沒宜祔食 죽은 후에 배향함이 마땅하도다 廟貌有儼 사당의 모습 우뚝하니 克日載卜 길일을 택하였다 山增而高 산은 더욱 높아지고 水闢益廣 물은 더욱 널리 열리도다 道脈重肥 도맥은 더욱 두터워지고 斯文未喪 斯文은 없어지지 않으리라 靑衿坌集 푸른 도포의 선비들 모여들어 虔薦明禋 경건하게 향사하노니 尙其歆格 神靈께서는 흠향하셔서 牖我後人 後人을 인도하소서
원문에는 涪翁이라 썼다. 이는 송나라의 程頤를
말한다. 그가 소식과 대립하다가 부주로 귀양 갔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원문에는 考亭이라 썼는데 이는 송나라 유학자 주희의 호이다.
王陳은 명나라 유학자인 王守仁과 陳獻章을 가리킨다. 전자는 知行合一說과 致良知說을 주장하였으며, 후자는 靜坐하여 마음을 깨끗이 함으로써
이치를 直觀하는 방법을 주장하여 주자학파의 비난을 받았다. 象山은 송나라 유학자 陸九淵을 말한다. 그는 주자와 같은 시대 사람인데,
실천에만 힘을 쏟을 뿐 講學을 완전히 폐하였으며 오로지 頓悟하는 것만으로 宗旨를 삼았다. 이에 주자는 이것이 禪學과 같다면서 강력히
비난하였었다. 공자가 노나라에서 나온 것에 비추어, 퇴계가 나온 안동을 동쪽의 노나라라고 불렀다.
英山書院告諭諸生文[代宣敎公作]
夫書院之作, 何爲也. 爲尊賢講學而作也. 賢不尊則無以感發興起而有所準則焉, 學不講則無以格物窮理而有所成就焉, 書院之設,
顧不重歟. 蓋天地儲精, 萬物化生, 而得五行之秀者人也. 是故粹然在中, 而爲仁義禮智信五常之性, 燦然著外. 而有父子君臣夫婦長幼朋友五倫之道.
惟其粹然於內, 是以能燦然於外, 固未嘗豐嗇於智愚存亡於古今也. 然而人之氣稟, 不能無淸濁粹駁之不齊, 故有性焉安焉而自誠明者焉. 有學焉修焉而由敎入者焉.
自非聰明睿智能盡其性者, 未有不待敎而成者也. 是以上自唐虞, 下及三代之隆, 莫不有敎, 其曰司徒也典樂也學也校也庠也序也, 其所以爲敎者, 槩可見矣.
逮于後世, 斯學不立, 斯敎不明, 五常之性, 汩而不全, 五倫之道, 塞而不達. 貿貿焉千有餘年, 而程·朱子出, 旣以主敬窮理而全此性矣,
建則敦敍而明此倫矣. 於是表章乎大學, 蒐輯乎小學, 其所以培根達葉, 羽翼風化者, 無所不至. 而又於南康, 修起白鹿書院, 宏其規範, 詳其節目,
揭敬義之符, 示明誠之訣, 儼然兆一代之敎而垂萬載之法, 此中朝書院之所始, 而曁乎元明之世, 多至數百所者, 蓋亦倣此而爲也. 惟我東方, 越在海表,
而禮讓文物, 無愧中華, 仁賢輩出, 前後相望. 圃隱先生唱之於前, 言出當理, 行可底績, 州庠國學, 皆所創建. 當此之時, 世極否而道益顯, 見而興者,
吉先生也; 聞而知者, 佔畢公也. 自是厥後有若寒暄·一蠹·靜庵·晦齋, 皆是聞風而作者. 而至于我退陶先生而有大焉, 明誠兩進, 博約兼擧,
其所以養其性厚其典者至矣. 於是深慮敎道之未明, 士風之頹敗, 思欲作育成就, 以敦興化之本. 而又念國學鄕校在城郭朝市之中, 前有學令之拘,
後有外物之誘, 未若書院之寬閒靜棲而可以歌詠. 先王深究義理, 有以熟其仁蓄其德, 故因周武陵世鵬之創而恢張白雲之院, 以倣白鹿之規而爲一邦矜式之地.
蓋吾東書院自白雲始, 而儒先播芬之鄕, 爭自立院, 到于今尤盛也. 然而人亡道喪, 斯敎昧昧, 挾書遊院之士, 從事乎記誦, 綴緝於章句.
自髫齔以至於白紛, 而終始爲利甚, 或事口舌相訾嗷, 蔑棄遜讓之風, 反成爭勝之場, 不亦悲乎. 向所謂尊賢講學而設者, 果安在哉. 寧之英縣, 僻處山水之區,
爲民者儉而質, 爲士者直而諒, 恨未有君子之彬彬也. 縣之父兄, 是用爲慮, 謀諸同志, 營建祠宇, 奉享退陶先生, 而配之以金鶴峯先生, 旣虔旣肅,
洋洋如在, 自此士有依歸而知所慕矣. 況其境界淸絶, 迥出塵囂, 奧而有林壑之幽, 曠而有軒楹之敞, 眞所謂息焉游焉而談義理於燕閒者也. 游于是者,
其將何所事而得以成父兄之望, 副立院之意哉. 亦曰尊賢而講學也, 尊之如何. 學先生而已, 誦先生之言, 服先生之行, 以到志其志學其學. 而動靜云爲,
無所不法, 則其所以尊之者, 不亦大乎. 然徒有尊賢之志而不有講學之實, 則未免有還珠買櫝之譏矣. 故道必講而後明. 而其所以講之者, 亦將讀書而窮其義理,
考古而辨其得失, 處事而審其是非. 而又當講磨乎師友, 思索乎吾心, 終之以力行, 以求至焉, 則所講者能爲吾有, 而粹然之性得矣, 燦然之道行矣.
天之與我者, 於是可全, 而先賢設敎之意, 庶幾無負矣. 嗚呼, 靈於萬物者人也, 秀乎凡民者士也, 生於天地之間, 而得其靈且秀焉者, 亦幸耳.
今諸君旣靈而人矣, 又秀而士矣, 旣有此二幸, 而又能感發於君子之風, 俛焉孶孶, 蔚然爲他日思皇之美, 則又幸之幸矣. 吾所以告諸君者, 若是而已矣.
諸君其各勉焉.
대저 서원을 만든 것은 무엇을 위해서인가. 先賢을 높이고 講學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선현을 높이지 않는다면
감동하여 떨쳐 일어나 기준으로 삼을 것이 없게 되며, 학문을 익히 지 않으면 格物致知하여 성취하는 바가 없으니, 학원을 세움이 중요하지 않으랴.
대개 천지 의 精氣가 모여 만물이 만들어 졌는데 그 중 五行의 빼어난 것을 얻은 것이 사람이다. 이런 까닭으로 순수하게 그 마음에는
仁·義·禮·智·信이라는 五常의 성품이 있고, 찬란히 밖으로 드러나서 父子·君臣·夫婦·長幼·朋友이라는 五倫의 도가 있다. 오직 순수하게 그 마음에
있는 것이므로 찬란히 밖으로 드러낼 수 있는 것이지 진실로 지혜롭고 어리석은 사람 사이의 넉 넉하고 인색함의 차이나, 옛날과 오늘날에 있고 없는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 람의 기운과 품성에는 淸濁粹駁의 차이가 없을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성품으로 여기고 편안 히 여겨 절로
진실로 밝은 사람이 있는 것이고, 배우거나 닦아서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들어 가는 자가 있는 것이다. 절로 총명하고 슬기로워 그 성품을 다하는
것이 아니요 가르침을 기다려서 이루지 않는 사람이 없다. 이런 까닭으로 요순 이후 아래서 삼대의 융성함에 이르 도록 학교가 있지 않음이 없어서
司徒니 典樂이니 學이니 校니 庠이니 序니 하였던 것이니 학교가 있었던 이유를 대개 볼 수 있다. 후세에 이르러는 이 학교를 세우지 않고
이 배움도 밝히지 못하여 五常의 성품이 점점 없어 지며 오륜의 도도 막혀서 통달하지 못하였다. 천여 년 후에 정자 주자가 나와 敬을 주로 하 여
이치를 궁구하여 이 본성을 온전히 하며, 법칙을 만들어 돈독히 서술하여 이 차례를 밝 혔다. 이 때에 『大學』의 글을 밝히고 『小學』을 묶었으니
뿌리를 돋우어 잎에까지 도달 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으니, 교화를 드날려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또 南康에 白鹿書院을 세우고 그 규범을 널리
정하고 節目을 상세히 하여 敬義의 부절을 걸며 明誠의 글을 밝힘으 로써 한 시대의 교육을 엄연히 이루어 만세의 법을 드리우니 이것이 중국 서원의
시작이다. 이것이 元나라 明나라 시대에까지 이어져 수백 개에 이르게 되니 대개 또한 이것을 본받아 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멀리 바다 밖에
떨어져 있으나 禮讓文物은 中華에 부끄러울 것이 없다. 仁賢이 무리를 이루어 나와 앞뒤가 서로 보일 지경으로 이어진다. 포은 정몽주 선생이 앞에서
창도 하여 마땅한 도리를 말하며 이에 따라 공적을 행하여 州庠과 國學이 모두 이때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때를 당하여 세상은 혼탁해도 도는 더욱
드러나, 포은을 보며 흥기한 이가 길재 선생이요 듣고서 안 사람이 점필재 김종직 공이다. 이때 이후로는 寒暄堂·一蠹·靜庵·晦齋가 있었으니 모두
남긴 가르침을 듣고서 일어난 이들이다. 우리 퇴계 선생에 이르러서는 더욱 위대함이 있다. 明과 誠 둘을 진전시키며 중요한 것들을 두루 들어서 그
성품을 기르며 그 典을 두터이 하는 것을 지극히 하였다. 이때에 敎道가 밝혀지지 않고 士風이 쇄락한 것을 깊이 염려하여 교육을 성취하여
교화의 근본을 돈독히 하려고 생각하였다. 또 國學과 鄕校가 성곽의 저자 가운데 있어서 앞에는 學令의 구속이 있고 뒤로는 外物의 유혹이 있어서,
서원이 한가하고 조용한 곳에 있어 그곳에 거하면서 읊조리는 것만 못하였다. 선왕께서는 義理를 궁구하여 그 어짊을 익히며 그 덕을 기름이 있었다.
그런 까닭에 武陵 周世鵬이 창건한 것을 인하여 白雲書院을 넓혀서 백록동 규약을 모방하여 한 나라의 矜式이 되는 땅을 만들었다. 대개
우리나라 서원은 백운동 서원에서 시작하여, 先儒가 지난 고장에서는 다투어 스스로 서원을 세웠는데 오늘에 이르러서는 더욱 성행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죽고 도를 잃어버 리니 이 가르침은 어두워져서 책을 끼고 서원을 다니는 선비가 암기하는 것을 일삼고 글자 구나 짜깁기하고 있다.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처음부터 이익만을 위하는 것이 심 하며 혹 일마다 서로 헐뜯으며 겸손히 사양하는 풍속을 멸시하고 버리고서 도리어
다루고 이기는 현장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이른바 先賢을 높이고 학문에 힘쓰 기 위해 만들었다는 것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영양의 영산현은 山水 한쪽 땅에 치우쳐 있 어서 백성들은 검소하고 질박하며 선비들은 곧고 미덥지만 군자가 환히 빛남이 있지 않음을 한으로
여겼다. 마을의 부형들이 이것을 걱정하다가 함께 뜻을 모으기로 의논하여 祠宇를 짓고 퇴계 선생을 봉향하고 학봉 선생을 배향하였다. 경건하며
엄숙함이 이와 같이 드날리 니 이로부터 선비들이 귀의할 곳이 있으며 흠모할 것을 알게 되었다. 하물며 이 땅이 매우 깨끗하여 더럽고
왁자지껄한 것이 나지 않는다. 안쪽에 그윽한 수풀이 있고 들판에는 높다란 건물이 있으니 진실로 이른바 쉬고 노닐며 편안하게 義理에 대해 이
야기할 수 있는 곳이다. 여기서 노니는 자는 장차 무엇을 일삼아서 부형의 바람을 이루고 더불어 서원을 세운 뜻에 부합할 것인가. 또한 선현을
높이고 학문에 힘쓴다고 하였는데 높 인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선생의 지난 행적을 배우고 선생의 말을 외우며 선생의 행동을 본받아서 그 뜻을 뜻
삼고 그 학문을 배우는 데에 이르는 것이다. 움직임과 말과 행동에 본 받지 않은 것이 없으면 그를 높인다는 것이 또한 큰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한갓 선현을 높이는 뜻만 있고 학문에 힘쓰는 실제가 없다면 구슬을 돌려주고 나무궤를 샀다는 비웃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도는 반드시 배운 후에야 밝아지는 것이다. 학문에 힘쓴 다는 것은 또한 장차 책을 읽고 그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다. 옛것을 상고하여 그 득실을
판 별하여 일을 처리함에 그 옳고 그름을 살피는 것이다. 또 師友간에 서로 학문을 토론하며 닦아서, 내 마음을 다하기를 생각하며 끝내 힘써
행하여 지극함에 이르기를 구한다면 익힌 것이 내 것이 되어 순수한 성을 갖추며 찬란히 도를 행하게 되는 것이다. 하늘이 나에게 준 것이 이때에야
온전히 될 수 있으며 선현께서 가르침을 베푼 뜻을 그제야 거의 저버리지 않 게 되는 것이다. 아아! 만물의 영장이 사람이며 모든 사람
중에 빼어난 이가 선비이다. 천지사이에 태어나 그 신령하고 빼어난 것을 얻은 것은 또한 다행일 뿐이다. 이제 제군들은 이미 영장인 사람 이며 또
빼어난 선비이다. 이미 이 두 가지 행운이 있는데 또 군자의 가르침에 감발될 수 있으니, 힘쓰고 힘써서 우뚝이 훗날 매우 훌륭한 아름다움을
이룬다면 또한 다행이고 다행 이겠다. 내가 제군들에게 말하는 것은 이것뿐이다. 제군들은 각기 힘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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