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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편 - 鏡光書院(경광서원) -

 

鏡光書院三賢請贈疏 *이보(李簠) 경옥집(景玉集)

 

伏以 崇獎節義 乃激世勵俗之方 洗滌幽枉 實顯忠尙賢之道 是以 古之明君 莫不以此爲重 雖在百年之久遠 而必循不泯之公論 如有不事二君 能全節義 則追加襃美之典 遭時罔極 賢良罹禍 則亦渙曠蕩之恩 斯豈非扶植綱常 表著忠賢 立萬世之大防 釋久鬱之輿情者乎 臣等伏見 前朝臣判司僕寺事裴尙志 氣節遵峻 志操高潔 其在司僕寺也 中書官欲以故事庭屈之 卽脫帽奮袂而去 旣而見國祚之將亡 棄官歸鄕 絶意仕進 及聖朝受命 不渝素志 築室屛居 環種栢竹 因以自號 其時 前朝門下注書吉再 亦退居金烏山下 方勵西山之操 二人出處 旣同 道義相孚 唱和詩律 以見其志焉 當時稱前朝節義之臣者 必以二人並論而儷美 其後吉再則國家之褒獎備至 贈以崇秩 吉再之聲名節義 燀爀於耳目 而獨裴尙志 朝無褒異之典 世無闡揚之人 使栗里淸風 寂寥於數百載之後 豈非聖世之欠典 而輿情之慨然者乎 臣等竊又見 成廟朝弘文館校理臣李宗準 早師金宗直 其文章節義 大爲成廟所寵遇 一時名賢如先正臣鄭汝昌金宏弼及名儒金馹孫曹偉兪好仁南孝溫洪裕孫等 上下議論 切磋道義 而咸推宗準爲前列焉 嘗以書狀官奉使燕京 詩文書畵 獨步中華 中華之人目之以三絶 此其餘事也 其在經幄 補益弘多 文足以黼黻王猷 忠足以陳善納誨 逮至燕山朝戊午禍起 與金馹孫等 騈首就戮 其後中廟改玉 大霈鴻恩 被禍諸賢 咸得昭雪 還其本職 又加褒贈 而只李宗準一人 未霑旌恤之恩 當時聖恩 豈獨嗇於宗準 而抑宗準旣無嗣續 不得以志行風節 徹聞於朝廷而然耶 時代遷變 歲月浸久 聲名日就湮沒 志節無少槪見 衰草荒山 斷隴凄凉 數尺苔碑 只書及第李宗準之墓 至今行路指點 莫不掩涕興嗟 則可見悼惜忠直 愛慕前賢 寔秉彛所同 不以今古而有殊也 粤在五十年前 鄕邦之人 慕仰兩賢節義 卽其所居近地 立祠俎豆 而號曰鏡光精舍 所謂不死之人心難泯之公議 亦可驗矣 臣等竊伏念 國家之所以崇獎節義顯揚忠賢 非但榮其旣骨之人慰此冥漠之魂也 誠以人臣之防範善惡之勸懲 皆係於此 而所謂節義忠賢 亦必有待於國家之褒獎顯揚然後 可以不泯於久遠也 不然 則時勢有古今 耳目有遠近 幾何而不磨滅澌盡無所尋逐也耶 故 我太宗大王之於吉再 中宗大王之於戊午諸賢 極加褒美 彰其節義 俱許贈職 表其忠賢 又於建院立祠之地 並賜恩額之典 而惟此兩臣 旣未蒙褒崇之贈 又未有頒額之恩 臣等不勝痛惜焉 伏願 殿下上體太宗 下法中廟 深嘉不二之貞操 特哀抱寃之忠貞 推褒獎吉再之典 以及於裴尙志 擧戊午諸臣之贈 同施於李宗準 使褒獎之澤 及於泉壤之間 宣額之恩 加於俎豆之地 則其所以樹風聲解冤鬱 尤有光於朝宗矣 臣等又竊以爲 故參奉臣張興孝 亦近世儒賢也 出入於先正臣金誠一柳成龍兩賢之門 早聞心學之要 不事擧子之業 篤志勉行 固窮安貧 而尤用力於易學 推演一元消長之理 作爲圖說 以喩後學 而先正臣鄭逑 至以發前人未發稱之 其所學之正造詣之深 於此亦可見也 仁廟朝 特除齋官以嘉獎之 而恩命未至 不幸先逝 使林下潛德不得施於當時 而其遺風餘馥 足爲師表於後世 故並爲陞祀於兩臣之廟 蓋以前後出於一里 而傳芳襲美也 如使褒崇之典一體施行 則足以慰多士久鬱之望 亦可以彰國家崇儒之道矣 臣等嶺外蒙學之士也 生在君子之鄕 慕仰君子之風 深恐節義道德漸至沈淪 不克顯揚於世 而其於我聖朝扶綱立紀之缺有所闕 故裏足千里來叫九重 凟擾之罪在所不赦 臣等不勝區區懇祈之至 謹昧死以聞

 

엎드려 바라옵건데 節義를 崇獎함은 이에 世上을 激勵하고 風俗을 가다듬는 方法이 요, 드러나지 않은 억울함을 洗滌함은 실상 忠節을 드러내고 尙賢하는 道理입니다. 옛날 明君이 이것을 所重히 여기지 아니치 못함은 비록 百年의 久遠한 일이라도 반 드시 泯滅하지 아니한 公論을 따른 것입니다. 만약 不事二君하여 能히 節義를 온전 하게 지켰다면 追後해서도 褒賞하는 아름다운 法典을 내리는 것이며 罔極한 時期를 만나 賢良들이 禍를 當한 즉 또한 曠蕩의 恩典을 찬란하게 밝힘이 이것이 어찌 三綱五倫을 扶植하며 忠賢을 表著함이 萬世의 大防이며 오래 억울한 輿情을 가려내는 것이 아니니까, 臣 等이 엎드려 보옵건데 前朝臣判司僕寺事裵尙志는 氣節이 酒樽하 고 志操가 高潔하여 그가 司僕寺에 在職할 때 中書官이 옛일로 뜰 아래 屈服시키려 하니 官帽를 벗고 옷소매를 뿌리치고 떠났으며 이미 나라 社稷이 장차 亡함에 벼슬 을 버리고 鄕里에 돌아와서 벼슬에 나아갈 뜻을 끊고 聖朝가 天命을 받음에 이르러 서는 素志를 넘지 아니하고 집을 짓고 집 가에 栢과 竹을 둘러심고 栢竹으로 自號 를 했으며 그대 前朝臣 門下 注書인 吉再도 또한 金烏山 밑에 隱退하여 西山之操를 가다듬었으니 두사람의 出處가 다 같으므로 道義로 서로 믿고 唱和의 詩律로서 서 로 뜻을 나타낸 것을 보면 當時 前朝節義臣을 稱할 때 반드시 二人을 並論했으며 함께 아름답게 여겨왔으나 그 後에 吉再는 國家의 褒獎을 갖게 이르러 높은 品秩로 贈職되니 名節과 節義가 至今까지 耳目에 輝煌하나 그러나 홀로 裵尙志는 朝家에 별달리 褒賞의 恩典이 없으니 世上에 闡揚하는 사람이 없으니 栗里의 淸風이 數百年의 後世에까지 寂寥하니 어찌 聖君의 世上에 缺陷된 法典이면서 輿情이 慨然하지 않으리까, 臣 等이 간절하게 도 보았습니다. 成廟朝敎理 臣李宗準은 일찍이 金宗直 을 師事해서 그 文章과 節義가 크게 成廟께서 寵愛로 禮遇하여 一時 名賢인 先正臣 鄭汝昌, 金宏弼 및 名儒 金馹孫 曾偉 兪好仁 南孝溫 洪裕孫 等과 上下로 議論하고 道義로 切磋해서 모두 宗準을 前列로 推戴하였으며, 일찍이 書狀官으로 燕京에 奉使했을 때 時文書畵가 中華에 사람들이 따를 수 없게 뛰어남에 中華 사람들이 三絶 로 指目했음은 이는 모두 餘事에 지내지 못하고 그가 經筵席에 있을 대 補益이 매 우 많아서 文學은 足히 黼黻을 입고 王猷를 도왔으며 忠誠은 足히 陳善納誨하였으 나, 燕山朝에 戊午士禍가 일어나서 金馹孫 等과 같이 목이 끌려가서 죽음을 當했으 나 그 後에 中廟께서 改玉하심에 크나큰 恩典이 禍를 입은 諸賢에게 내려 모두 누 명을 씻고 그의 本職을 돌려 받았으며 또 贈職까지 내렸으나 다만 李宗準 한 사람 은 㫌恤의 恩典을 입지 못했으니 當時 聖恩이 어찌 홀로 宗準에게만 吝嗇하였으리 요. 그러나 宗準이 嗣續이 없어서 志行과 風節을 朝廷에 徹聞못해서 그렇게 된 듯 하옵니다. 時代가 變遷되고 歲月이 오래되니 名聲이 날로 湮沒해져서 志節의 경위 를 조금도 볼 수가 없고 풀이 무성한 거친 山의 무덤에 凄凉하게 數尺의 이끼낀 碑 에는 다만 及第 李宗準의 墓라 쓰였으니 至今 길가는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슬픔 을 자아내고 눈물을 가리지 않을 수 없음을 可히 忠直을 愛惜해 하며 슬퍼함과 前世의 賢人들을 愛慕함은 진실로 秉彛의 뜻이 다 같으며 今古에 다름이 없지 아니함 입니다. 지난 50年前에 鄕邦의 사람들이 兩賢이 節義로서 곧 그의 所居地 가까운 곳에 祠堂을 짓고 祭享을 지내며 號를 鏡光精舍라 하니 예로부터 傳하는 말에 없어 지지 않는 人心이면 泯沒되지 않은 公議가 된다고 함이 事實인 듯 하옵니다. 臣 等 이 엎드려 간절히 생각하오니 國家에서 崇獎節義하고 忠賢을 顯揚함이 다만 그것은 이미 白骨이 된 사람의 冥漠한 魂을 慰勞함이 아니라 진실하게 人臣들에게 模範이 될 수 있는 善惡을 勸徵함이 모두 이런 일에 關係되며, 말하자면 節義忠賢이 또한 國家에서 褒獎이 내려 顯揚시킨 然後에야 진실로 久遠토록 泯滅하지 아니합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時代가 古今이 있고 耳目도 遠近이 있어서 어찌 磨滅澌盡해 져서 찾아볼 수 없게 되지 아니하리요. 그런 까닭에 우리 太宗大王께서 저 吉再에 게와 中宗大王께서 저 戊午 諸賢에게 至極히 아름다움을 褒賞하고 그의 節義를 빛 냈으며 모두 贈職을 許諾하시고 그 忠賢을 㫌表하시며 또 書院을 세워 祭享을 받들 곳을 마련하고 恩額의 典을 내리셨으나 그러나 오직 이 兩賢에게는 아직도 褒賞을 입지 못하고 또 頒額의 恩典이 없아오니 臣 等이 痛惜함을 이길 수 없나이다. 엎드 려 원하옵건데 殿下께서는 위로 太宗大王과 아래로 中宗大王을 본 뜨시와 깊이 不二의 貞操를 加護하시고 特히 抱寃의 忠情을 슬피 여기시와 吉再를 褒獎하는 法典 으로 裵尙志에 미치게 하시며 宣額의 恩典이 祭享을 치루는 곳에까지 더하시면 곧 그는 風聲을 심어 寃痛하고 抑鬱함을 풀리게 할 것이며 더욱이 祖宗에게도 榮光스 러우리이다. 臣 等이 또 가만히 생각하니 故參奉 臣 張興孝는 近世 儒賢입니다. 先正臣 金誠一 柳成龍 兩賢의 門下에 出入하며 일찍이 心學의 要諦를 듣고 科擧를 볼 생각은 아니하고 篤實한 뜻으로 힘써 行하며 固窮하고 安貧했으며 더욱 易學에 힘 써 一元消長의 理致를 推演해서 圖說을 만들어서 後學에게 깨우치니 先正臣 鄭逑가 前人들의 發明못한 것을 發明했다 稱讚했으니 그의 學問의 正大함과 造詣의 깊음을 또한 볼 수 있으며 仁廟朝에 特別히 齋官을 除授해서 그의 아름다움을 권장했으나 恩典의 命이 아직 내리기 前에 不幸히도 先逝하여 山中에 묻혀 있는 德性을 當時에 베풀지 못하고 그 遺風餘馥이 足히 後世에 師表가 되는 故로 兩臣이 廟에 陞祀하였 습니다. 모두가 前後해서 한 마을에 나셨으며 遺芳이 傳해서 그 아름다움을 踏襲하 고 있나이다. 만일 褒美의 典으로 하여금 一體施行 하시게 되면 足히 多士久鬱의 바램에 위안이 될 뿐 아니라 國家에서 儒術을 높이는 道理를 밝힘입니다. 臣 等은 嶺外의 蒙學의 士입니다. 君子의 鄕에 살고 있으면서 君子의 風采와 度量을 慕仰하 오며 그 분의 節義道德이 漸漸 沈淪해서 世上에 顯揚하지 못하고 우리 聖朝에서 扶綱立紀에 欠闕한 바가 될까 두렵사옵니다. 그런 까닭에 千里길을 不計하고 와서 叫訴하오니 九重宮闕에 瀆擾之罪는 客恕하지 못할것이나 臣 等이 궁금함을 이기지 못 하여 懇切이 至誠으로 祝願하고자 삼가 죽기를 무릅쓰고 드리는 바이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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