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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편 - 氷溪書院(빙계서원) -

 
위치 : 의성군 춘산면 빙계동
건축 : 1556년(명종 11) 의성읍 장청변에 창건, 1576년(선조 9) 사액, 1600년(선조 33) 현 위치로 이건, 1868년(고종 5) 훼철, 현재(2004년 1월) 옛 터에서 500m 아래 지점에 새로 건축 중
배향인물 :  김안국(金安國), 이언적(李彦迪), 유성룡(柳成龍), 김성일(金誠一), 장현광(張顯光)
배향일: 不享

“壬辰亂後 院宇頹圯 萬曆庚子(1600) 邑人監司李光俊 移建于縣南四十里氷山面 氷山寺舊址 改稱氷溪書院”(『列邑院宇事蹟』권4, 慶尙道氷溪書院條) 등의 기록 있음

 

▶ 해설

 

성군 춘산면 빙계계곡은 경북 8경 중의 하나로, 현재 의성의 대표적 관광지이다. 이 계곡의 氷穴이 있는 곳이 바로 옛날 빙계서원이 있던 자리이다. 본래 이 곳에는 빙계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그것이 사라지고 난 옛 터에 빙계서원을 세웠었다. 나중에 이 서원까지 훼철되어 없어 졌으므로 이 자리에 지금은 빙계사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5층석탑만이 남아 있다.
현재(2004년 1월) 이 옛터에서 아랫쪽으로 500m정도 떨어진 곳에 새로 이 빙계서원을 짓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 관련 글

 

冰溪書院記

今上卽位之六年乙巳春, 冰溪書院儒生以山長金君尙瑜氏意, 來請余以代其任, 辭旣不獲 約以是年三旣朢, 相會院中, 而如約往焉. 翼日, 余友李上舍重炫士明來訪余. 仍語余曰: “是院之廢興顚末, 吾子旣自知之, 吾又奚以語吾子. 但前輩之勤勤, 爲後學興起, 斯文底事不可不傳而柰何無識者. 遂使其人與名不百年而已泯泯, 此則鄕子弟之罪也. 子其記之無以重其罪也. 余惟是院舊在長川, 士明之曾大父相國公首議移建于此. 士明尊府君又從而重新之, 至于今賴而不廢. 士明先世興學之功, 不其大矣乎. 吾聞, 先祖有善而子孫不能知, 是不明也. 知而不能暴白以傳於後, 是不仁也. 然則士明之爲是汲汲, 亦其宜也. 顧余涉學未久文且下, 將不能有所發明於士明之意.” 然慕仰之深願得託名於紀績之文, 不敢以不能對, 猶且重其事, 不敢下手者, 又一年矣. 今也, 士明已作泉下人. 噫! 亡友之囑, 余又惡乎辭也.
謹按, 本縣卽慕齋金先生·晦齋李先生遺馥之地也. 嘉靖丙辰, 悔堂申公元祿議建書院于縣南五里許長川之上, 以祀兩先生. 而萬曆丙子, 宣賜其額曰長川書院, 蓋象賢之典也. 今考大明一統志, 中國人於程朱一憩馬一嘯詠之地, 無不起書院崇奉, 則吾鄕之於兩先生, 其可無其祠乎. 先輩之所以立院宇以享之, 宣廟之所以賜寵額以襃之者, 宜乎其不容已也. 未幾, 値任癸兵火, 院宇幾乎頹廢, 遂自長川移建于冰溪之陽. 蓋以長川舊址, 在於縣邑近地, 車馬之所騈闐, 市街之所喧鬧, 不宜於後學之藏修也, 豈特因兵火而爲也. 冰溪遠在縣南四十里外, 山回而秀, 地僻而幽, 下有石澗飛泉淸淺可愛. 又有風巖冰穴, 盛夏凝寒. 辛引孫詩所謂‘冰山名勝擅吾東’者, 是也. 古有太一殼, 又有冰山寺, 不知刱於何代. 而成化戊戌, 殼移泰安郡, 萬曆壬辰, 寺亦火于兵. 天其或者亦有慳秘之意 而爲今日儒宮之地也邪. 時則有若李相國光俊, 以爲時不可失, 詢于耋達于朝不卜, 而決定移院之議, 實萬曆庚子歲也. 當是時新經大亂, 民物凋弊, 思所以不煩民, 而集事者乃撤舊材拾殘瓦, 隨便營造, 越明年辛丑, 工告訖, 祠宇與講堂曁東西齋及乎前樓童蒙齋公需廳總三十餘間, 雖在亂後草刱, 而學宮規模無不備者. 然堂隘陛湫, 或不無不容之病.
歲老日久, 亦未免上雨之患 時則有若李公延橚, 以相國之孫有肯堂之志, 乃以重建之責爲己任, 與朴君㙉氏經始而董成之. 於是乎, 鄕老儒生無不盡其力, 按使邑宰亦或損其俸以助之. 丁亥春, 廟宇成, 戊子秋, 書樓起, 甲午, 改廚舍, 壬寅, 建講堂, 前後凡十數年. 夫然後, 昔之隘者大, 卑者高, 其俎[竹+豆]者挾筴者, 升降周旋, 得有餘地, 而擧無矮陋之憂. 吁! 其盛矣哉.
李公永陽人, 字子長. 斯文重事, 實有得於家世淵源 又其胸中有許多間架 觀此學舍宏規 亦可以端倪之矣. 然李公今且老矣, 其在後者無窮, 庶後人觀李公之事, 而使是院仍新增舊, 繼之於無窮, 則是邦斯文之幸, 未或不在, 於是記云. 時丙午四月乙卯, 古隱後學記.


지금 임금 즉위 6년 을사년 봄에 빙계서원 유생이 山長 金尙瑜의 뜻으로 와서 내게 그 책임을 맡아달라고 청하였다. 사양할 수 없기에 올 해 3월 16일에 서원에서 함께 모이기로 약속하고 약속한 날에 가 보았다. 그런 다음 날 내 친구 上舍 李士明이 나를 찾아와서 내게 말했다.
“이 서원의 廢興顚末은 자네가 이미 스스로 알 것이니 내가 또 어찌 자네에게 말을 하겠는가. 다만 선배의 열심은 후학들을 흥기시키는 것이 되며 우리 유학은 어떻게 하든 꼭 전해야만 하는데 알지 못하는 자들이 마침내 그 사람과 이름이 백년도 못되어 잊혀지도록 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것은 고장 자제들의 죄라네. 자네가 그것을 쓴다면 그 죄가 무겁지는 않을 것일세. 생각건대, 이 서원이 長川에 있은 지가 오래라. 내 증조부 相國公께서 여기로 옮겨 세울 것을 가장 앞장서서 발의하셨고 내 尊府君께서 또 따라서 다시금 새롭게 하셔서 지금까지 이에 힘입어 없어지지 않았네. 내 先代께서 敎學을 일으키신 공이 어찌 크지 않은가. 내가 듣건대, 선조에 좋은 것이 있는데 자손이 능히 알지 못하면 이것은 밝지 못한 것이며, 알면서도 후세에 드러내어 전하지 못하면 이것은 어질지 못한 것이라 하더군. 그렇다면 내가 이렇듯 서두르려 하는 것이 또한 마땅한 것이지. 다만 나는 학문함이 오래지 못하고 또 글 또한 下手라 장차 능히 내 뜻을 펴서 밝힐 수 없다네.”

그러나 흠모하고 바라는 마음으로 紀績의 글 씀을 부탁받았으나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또 그 일이 중한지라 下手가 감히 하지도 못한 것이 또 일년이었다. 이제는 사명이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아! 죽은 벗의 부탁을 내가 또 어찌 사양할 수 있으랴.
삼가 생각건대, 우리 마을은 곧 慕齋 金先生과 晦齋 李先生이 風敎를 남기신 땅이다. 嘉靖 丙辰년에 悔堂 申元祿이 마을 남쪽 5리쯤 되는 長川 가에 서원을 세워서 두 선생을 제사하기로 발의하였다. 萬曆 丙子년에 ‘長川書院’이라는 편액이 내렸으니 대개 어짊의 모범됨을 본 받으라 함이다. 이제 大明 『一統志』를 상고해 보면 중국 사람들은 程子나 朱子가 한번 말에서 내려 쉬거나 한번 시를 읊조린 곳에는 서원을 세워 높이고 받들지 않음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 고장에서 두 선생을 위해 祠堂이 없을 수 있겠는가. 선배가 院宇를 세워 향사하려고 한 것과 선조임금께서 사액하여 기리신 것은 그만둘 수 없는 것이 마땅하다. 얼마 되지 않아 전쟁을 만나 院宇가 거의 무너져 없어지게 되자 마침내 長川으로부터 冰溪의 북쪽으로 옮겨 세웠다. 대개 장천 옛터는 縣邑과 가까운 곳에 있어서 車馬가 함께 질주하고 저자거리의 시끄러움 때문에 후학들이 藏修하기에 적당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다만 兵火 때문에만 그렇게 한 것이랴. 冰溪는 마을 남쪽 40리 밖에 있는데 산이 둘러 있는 빼어난 곳이며 땅이 궁벽져서 그윽하다. 아래로는 돌 사이로 샘물이 흐르는데 샘이 맑고도 얕아 아낄만 하다. 또 風巖冰穴이 있어 한 여름에도 춥다. 辛引孫의 시에서 말한 바 ‘얼음산 명승이 우리 동쪽을 차지하고 [冰山名勝擅吾東]’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옛날에 太一殼이 있었고 또 冰山寺가 있었는데 어느 대에 만들어졌는지는 모른다. 成化 戊戌년에 太一殼은 태안군으로 옮기고 萬曆 壬辰년에 冰山寺 또한 전쟁으로 불탔다. 혹시 하늘이 또한 아끼고 숨겼다가 오늘 서원의 터를 삼으려고 했던 것일까. 이때에 相國 李光俊이 때를 잃지 않으려고 이 늙은이에게 묻고 조정에 주달하였으나 터를 잡지는 않았으니 서원을 옮길 의논을 결정한 것은 실은 萬曆 庚子년이다. 이때는 새로 큰 난리를 겪은 터라 백성과 물자가 해지고 없어서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려는 생각에 일을 맡은 사람이 이에 옛 재료와 남은 기와를 수습하여 편의에 따라 일을 진행하여 다음 해인 辛丑년에 공사를 마쳤다. 祠宇와 講堂 및 東·西齋와 正門樓, 童蒙齋, 公需廳까지 총 30여 칸이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자 낡아서 또한 비에 상하는 근심을 면하지 못하였다. 이때에 우리 李延橚 공이 相國의 손자 肯堂의 뜻으로, 重建하는 책임을 자신의 소임으로 여겨 朴㙉 씨와 함께 일을 시작하여 완성하였다. 이에 鄕老儒生이 힘을 다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邑宰 또한 자기 녹봉을 덜어서 도왔다. 丁亥년 봄에 廟宇가 완성되고, 戊子년 가을에 書樓가 우뚝 섰으며, 甲午년에 廚舍를 고치고, 壬寅년에 講堂을 세우고 전후가 모두 십수 년이다.
대저 그런 후에야 전에 좁던 것이 크게 되며 누추하던 것이 높게 되며, 제단이 좁던 것이 오르내리고 이리저리 활동해도 남을 지경이 되니 장소가 좁고 누추한 근심이 모두 없어지게 되었다. 아아! 그 성대함이여.
李公은 永陽사람으로 字는 子長이다. 斯文의 중요한 일에 진실로 집안 대대로 淵源을 얻었고, 또 그 가슴 속에 허다한 계획이 있었으니, 이 學舍의 규모를 보니 또한 그 끝이나마 엿볼 수 있겠다. 그러나 이공이 지금 또 늙었고 그 뒤에 있는 자는 끝이 없다. 많은 後人들이 이공이 한 일을 보고 이 서원에 대해 옛것을 더욱 새롭게 하여 영원토록 잇는다면 이 고을 斯文의 소망이 혹 없지는 않을 것이다.
丙午년 4월 乙卯에 古隱 後學은 쓰노라.

이 서원이 있었던 자리에는 한 여름에도 시원한 바람이 나오는 바위동굴인 風巖과 한 여름에도 얼음이 언다는 동굴인 冰穴이 있다. 현재도 남아 있어서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氷溪書院 관련 옛 기록

○『교남지』39권
在郡南三里. 明宗丙辰申元祿創建. 享文敬公金安國. 宣祖丙子賜額長川. 庚子李光俊移建于氷山寺舊址, 改今名. 追享文元公李彦迪, 肅廟己巳, 追享文忠公柳成龍, 文忠公金誠一, 文康公張顯光.

○『列邑院宇事蹟』4권, 慶尙道氷溪書院條
壬辰亂後, 院宇頹圯. 萬曆庚子(1600), 邑人監司李光俊, 移建于縣南四十里氷山面, 氷山寺舊址 改稱氷溪書院.

○『俎豆錄』, 義城 부분
明宗丙辰建, 宣祖丙子賜額長川, 庚子移建政號冰溪.
金安國[鄕貫. 見廟庭] 李彦迪[宣祖庚子享] 柳成龍[金光粹之外孫. 肅宗己巳享. 見安東] 金誠一[鄕貫. 肅宗己巳享. 見安東] 張顯光[宣祖癸卯爲本縣倅, 肅宗己巳享. 見星州]

○『교남지』39권
군 남쪽 3리쯤 되는 곳에 있다. 명종 병진년에 신원록이 창건하여 문경공 김안국을 봉향하였다. 선조병자년에 '장천서원'으로 사액되었다. 경자년 이광준이 빙산사가 있던 옛 터로 옮겨 세우고 이름을 지금과 같이 고치고는 문원공 이언적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숙종 기사년에 문충공 류성룡, 문충공 김성일, 문강공 장현광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列邑院宇事蹟』4권, 慶尙道氷溪書院條
임진왜란 때에 서원과 묘우가 훼파되었다. 만력 경자년에 마을 사람 감사 이광준이 현의 남쪽 40리 빙산면 빙산사가 있던 옛 터로 옮겨 세우고 빙계서원으로 이름을 고쳤다.

○『俎豆錄』, 義城 부분
명종 병진년에 세워져 선조 병자년에 ‘장천서원’으로 사액되었다. 경자년에 옮겨 빙계서원이라 했다.
봉향인물: 김안국[의성김씨이다. 廟庭에 보인다.] 이언적[선조 경자년에 봉향했다.] 류성룡[김광수의 외손이다. 숙종 기사년에 봉향했다. 안동지역에 자세히 보인다.] 김성일[의성김씨이다. 숙종 기사년에 봉향했다. 안동지역에 자세히 보인다.] 장현광[선조계묘년에 이 고을 원이 되었다. 숙종 기사년에 봉향했다. 성주지역에 자세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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