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구(鄭逑)
정구(鄭逑 ; 1543∼1620)
조선 중기의 학자 정 구(鄭 逑 ; 1543∼1620)의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본관은 청주(淸州), 아버지는 사중(思中)으로 성주(星州)에 거주했다. 저자는 12세에 오덕계(吳德溪)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563년(명종 18)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업을 받았으며, 1573년(선조 6) 예빈사참봉(禮賓寺參奉)이 되었으나
부임치 않았으며, 1578년 사포서사포(司圃署司圃)가 되었으나 역시 사임했으며, 1580년 창령현감(昌寧縣監)이 되어 서재(書齋)를 설립하고
훈장을 선임하며 향교를 수리하여 교육을 장려하고 예속을 숭상하는 등 치적을 올렸으며, 이듬해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
의빈부도사(儀賓府都事), 사직령(社稷令), 군자감찰관(軍資監判官), 통천군수(通川郡守) 등을 역임하고, 1592년 왜란에 의병을 일으켜 토적에
힘쓰고, 이듬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江陵府使, 동부승지(同副承旨), 우부승지(左右承旨), 형조참의(刑曹參議), 안동부사(安東府使)를
지냈다. 1613년 계축옥사에 상소하여 영창대군을 구하려 했으며, 폐모사건에 또 소를 올리려다 그만 두었다. 1623년 (인조 1)에는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추증(追贈)하고, 1625년 시호를 문목(文穆)이라 하고, 1657년(효종8)에는 영의정(領議政)을
추증(追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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