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준량(黃俊良)
황준량(黃俊良 ; 1517-1563)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錦溪)이다. 사온서주부 영손(永孫)의
손자로, 치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교수 황한필(黃漢弼)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기동(奇童)으로
불리었고, 문명(文名)이 자자하였다. 1537년(중종 32) 생원이 되고, 1540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권지성균관학유(權知成均館學諭)로 임명되고, 이어 성주훈도로 차출되었다. 그뒤 1542년 성균관학유가 되고, 이듬해 학록(學錄)으로
승진되었으며, 양현고봉사를 겸하였다. 1544년 학정, 1547년(명종 2)에 박사가 되었고, 이어 전적에 올랐다. 1548년
공조좌랑에 재직 중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한 뒤 1550년 전적에 복직되고, 이어 호조좌랑으로 전직되어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으며,
《중종실록》·《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해 다시 병조좌랑으로 전직되었고, 불교를 배척하는 소를 올렸다. 이듬해
경상도감군어사(慶尙道監軍御史)로 임명되고, 이어 지평에 제수되었으나 앞서 그에게 청탁을 하였다가 거절당한 바 있는 언관의 모함이 있자 외직을
자청하여 신녕현감으로 나갔다가 1556년 병으로 사직하였다. 이듬해 단양군수를 지내고, 1560년 성주목사에 임명되어 4년을 재임하다가
1563년 봄에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오는 도중 예천에서 죽었다. 신녕현감으로 있을 때 기민을 잘 진휼(賑恤)하여 소생하게 하였으며,
전임관(前任官)의 부채를 절약과 긴축으로 보충하고 부채문권(負債文券)은 태워버린 일도 있다. 학교와 교육진흥에도 힘을 기울여 문묘(文廟)를
수축하고 백학서원(白鶴書院)을 창설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단양군수로 부임하였을 때는 경내의 피폐상을 상소로 극론하여 단양이
20여종의 공물을 10년간 감하여주는 특은(特恩)을 받도록 하였으며, 벽지에 있던 향교를 군치(郡治)에 옮겨 세우고, 이 지방의 출신으로서
학행이 뛰어난 인물들을 문묘 서편에 따로 사우(祠宇)를 마련하여 제사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성주목사로 나가서도
영봉서원(迎鳳書院)의 증수, 문묘의 중수, 그리고 공곡서당(孔谷書堂)·녹봉정사(鹿峰精舍)를 세우는 한편, 이 지방의 학자 오건(吳健)을
교관(敎官)으로 삼는 등 교육진흥에 힘써 학자를 많이 배출하였다. 우애가 돈독하였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데 아끼지 않았으며,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자식이 없어 아우 수량(遂良)의 아들로 양자를 삼았다. 풍기의 우곡서원(遇谷書院), 신녕의 백학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금계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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