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문집
서원
누정
고문서
학맥도

 

문집편 -三松堂遺稿 -

 

 映湖樓重修記

映湖永嘉之名樓也其江山? 偉之觀 雖或讓於晉之 矗石密之嶺南然而同居洛水之岸在映湖永嘉之名樓也 商山曰觀水 樓在一善曰月波亭殆不能與斯樓爭甲乙焉高麗恭愍王避紅巾南奔駐?于州遊是樓而樂之旣還都御書筵手寫樓額三大字以錫州人通判申子展增大樓制以揭之至今輝映 乎?棟間此則矗石嶺南之所無有也子展之作踞今百有餘年其間守宰豈無治其楹?板檻之朽搖者盖瓦級?之穿缺者然人心不同曲修人事者苞?問遺之爲急徒守規模者薄書期會之不暇孰肯用力於修擧廢墜以渫吾所畜之財用乎樓之日以頹?無足怪已吾同年齊安金侯?由御史中丞?左符于玆未數年政 通人和仍歲穰熟且土田臧獲之訟一道之人投牒監司願歸于侯侯每當二分之際夙夜裁決伸者負者俱滿其意由是收質之錢布充溢帑藏侯於是謀諸吏民改構斯樓遂以戊申三月日召募遊手輪役吏戶基地則因舊而尋引丈尺頗有增損其崇廣頓加三之一至其赤白之飾金泥之?亦煥燿改觀才閱數 月而厥功已就州民耆幼瞻仰咨嗟咸以爲神焉越明年春侯抵書於僕曰願有述焉僕輒不自揆竊喜與 淡庵牧隱二老聯名其間遂操?而歎曰侯之爲政廉平不苛動以法度其視曲修人事者不?若狗?其徒 守規模不?若僕隸吏民愛而敬之如見?黃於千百載之下其爲一樓而興功豈不 有餘裕哉?古來稱淳厚之俗無如是州其民可以易使乎?是樓之修非爲逸遊也非爲後世名也只毋墜舊規而止乎抑僕益有所感矣昔成和初身屬탁?從事于蔚山戎幕凡期年嘗以事往來是州非一二遭至則必登是樓?佯瞻睹其東三十里卽靑 효之境也沙麓祥雲靄靄屬天直與周室有邰之慶同其久長其北十里則甁山也逆萱千騎扼于險阻遂至崩奔僞將授首王氏之義氣大振于東南此戰爲之兆也西望豊岳哀元逢之先順 後悖不得與 六太師共享功名南望葛蘿山蒼翠控空其烟雲草木宛對金生學書揮灑之餘勢焉徙倚旣倦必泛舟信棹灣?曲渚溯?上下或至夜分興盡而旋凡樓之勝賞左右逢原而所得者多矣今已二十餘年尙이이往來于胸中也?使侯之大滿獲遂余南還之計則當以單童匹馬再遊湖上與侯登樓話舊且賦詩以續夫州民之輿頌云
“영호루()는 영()의 이름난 누()이다. 그 강()과 산의 뛰어나고 큰 모양은 비록 혹은 진주()의 촉석루(), 밀양()의 영남루()에 양보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같이 낙동강()으 언덕에 버티고 선 것으로서 상산()에 있는 것을 관수루()라 하고, 일선()에 있는 것을 월파정()이라 하는데, 그것들은 이 누()와 더불어 갑을()을 다툴 수는 없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하여 남쪽으로 달아나다가 이 고을에서 거가()를 멈추고, 이 누()에 노닐면서 즐기다가 환도()한 뒤에 서연()에 납시어 손수 누()의 현액()을 큰 글씨 석자〔〕를 써서 하사하였다. 이 고을 사람인 통판() 신자전()이 누의제도를 더 크게 하여 현액을 걸었는데, 지금까지 지붕과 마룻대사이에 빛나고 있다. 이것은 촉석루나 영남루에는 없는 것이다. 자전()의 일한 것이 이제 백 년이 넘는다. 그 사이의 수령들이 어찌 그 기둥과 서까래 마룻장과 헌함의 썩고 흔들리는 것과, 지붕의 기와와 계단의 벽돌 떨어진 것, 뚫어진 것을 수리함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같지 않다. 인사()를 곡진()하게 닦는 체하는 자는 웃 사람에게 뇌물을 바치며 문안을 드리기에 급하게, 한갓 규모()만 지키는 자는 장부()와 문서(), 회계() 때문에 겨를이 없다. 누()가 황폐하고 퇴락()한 것을 수리하여, 나의 저축한 재용()을 소비하기를 누가 즐기겠는가. 누()가 날로 무너지고 헐어지는 것이 이상할 것은 없다. 나의 동년()인 제안후()김질()이 어사중승()으로부터 이 고을의 수령으로 오더니, 두어 해가 못 되어서 정치()는 통창()하고 사람들은 화합()하며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 또 토지와 노비()에 대한 소송()은 온 도내()의 사람들이 감사()에게 진정서()를 내어 김후()에게 가서 판결 받기를 원하였다. 후()가 매양양편을 판결할 때에는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신중히> 재량()하여 결정하니, 승소()한 자도 패소()한 자도 다 만족해 하였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판결료()로 받은 돈과 베가 창고에 차고 넘치었다. 후()가 이에 아전과 백성들에게 의논하고, 이 누를 고쳐 쌓기를 하였다. 드디어 무신년 3월 어느 날을 기()하여 일 없이 놀고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이방()과 호장()을 윤번()으로 일보게 하였다. 터는 옛것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나, 면적의 척수()는 자못 더하고 털한 것이 있다. 그 높이와 넓이는 종래의 것보다 3분의 1을 더하였으며, 그 붉고 희게 장식하는 것과 금빛을 올린 현액은 또한 빛나고 밝아서 모양을 바꾸었다. 겨우 두어 달을 지나서 그 공사가 이미 성취하니, 고을 백성들은 늙은 이나 어린이나 모두 쳐다보며 감탄하며 다 신()이라고 하였다. 월명년()에 김후()가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기술()함이 있기를 원합니다.“고 하였다. 나는 문득 스스로 헤아리지 아니하고 가만히 담암()?목은() 두 노선생()과 더불어, 그 사이에 이름을 연기()하는 것을 기뻐하여, 드디어 붓을 잡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김후()의 정사함이 청렴하고, 공평하며 까다롭지 아니하고 움직이는데 법도()로써 한다. 그 인사()를 곡진하게 하는 체하는 자가 개돼지처럼 비열하게 할뿐 아니며, 그 한갓 규모만을 지키는 자가 종이나 하인처럼 굴 뿐 아닌데에 비교한다면, 김후는 아전과 백성들이 사랑하고 공경하여 공수()와 황패()를 천백 년 뒤에서 다시 보는 것 같다. 그가 한 누()를 위하여 공()을 일으키는 것이야 여유가 있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고래()로부터 순후한 풍속을 일컬음이 이 고을만한 데가 없으니 그 백성은 부리기가 쉬울 것이다. 더구나, 이 누()는 편안히 놀기 위한 것이 아니며, 후세()의 이름을 위한 것도 아니다. 다만 옛법을 떨어뜨리지 않는 데에 그친 것이겠는가. 문득 내가 더욱 느끼는 바가 있다. 옛날 성화()초년에 나는 몸이 군()관계의 직무에 소속되어, 울산()의 융막()에 종사한 것이 모두 2주년()이 되었다. 일찍이 일이 있어 이 고을을 왕래()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오기만 하면 반드시 이 누()에 올라서 어슬렁거려 노니며 조망()하였다. 그 동쪽 30리는 즉 청부()땅이다. 사록()의 상서로운 구름이 왕성하게 하늘에 이어져 있으니, 곧 주시()의 유래()의 경사()와 더불어 그 장구()함을 같이 하리라. 그 북쪽10리는 곧
병산()이다. 역적 견훤의 1천 군사가 험조()한 곳을 점거()하고 있었으나, 드디어 무너져 달아나게 되고 거짓 장수는 머리를 바치었다. 왕씨()의 의기가 동남()에 크게 떨치게 된 것은 이 싸움이 조짐이 된 것이다. 서쪽으로 풍악()을 바라보니, 원봉()이 먼저는 귀순()하고 뒤에는 배반하여 육명()의 태사()와 더불어, 공명()을 누리지 못한 것을 슬퍼한다. 남쪽으로 갈나산()을 바라보니 푸른 봉우리가 하늘을 떠받쳤는데, 그 연기와 구름과 초목이 완연히 김생()이 글씨 배울 때에 붓을 휘두르고 먹을 뿌리던 남은 기세()를 띠고 있는 것 같다. 왔다갔다하는 것에 게으러지면 반드시 배를 띄우고 노〔〕에 맡겨서, 만()안으로 굽어 나온

육지와 굴곡()진 물가를 거슬러 올라가고 흘러 내려가곤 하다가. 혼은 밤중에 이르러서야 흥()이 다하여 돌아오고 하였다. 모든 누()의 좋은 경치는 왼쪽에서나 오른쪽에서나 부딪칠 수 있어서 얻은 바가 많았었다. 이제 이미 20여 년이 지나갔으나 오히려 잊을 수 없는 생각이 가슴 속을 오락가락한다. 혹이나 김후의 임기()가 차기 전에 나로 하여금 남쪽으로 돌아올 계획을 성취하게 한다면, 곧 마땅히 하인 한 사람, 말 한 필의 간편한 차림으로 다시 이 호수()위에 노닐어, 후()와 더불어 누에 올라 옛일을 이야기하며, 또 시()를 지어 고을 백성들의 좋아하는 칭송()에 이을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돌아가기

Copyright ⓒ 2004 국제퇴계학회 대구경북지부(한자박사 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