補遺
後孫龍漢答鄭易簡書曰 春初執事以龍漢家遭先幀絳雲之災 遠辱垂問 何其辭之惋而感之長也 龍漢輩 不弔衰墜 旣無以奉護肅淸
又不得身與大火俱滅 而獨皇皇怵惕於灰土之墟 無所告愬 乃有執事者哀而憐之 非徒哀之 又辱敎之遠矣 此意何敢忘也 先祖勇退人 遺眞亦不冕而幘矣 露頂振袖
榻於林木之間 偉骨豊髥 衣裳翛然 綃已久沫 依俙辨顔色矣 綃末有自題贊 孫吳未學 國恥誰雪 詩書畧涉 腐儒誰說 尋常老夫 後裔何法 終歸拭案 觀之不足 春風芳草
自笑而筆 詩筆聞於當世 墓碣所稱詩李杜筆金生者 非諛語也 有遺稿之手草漫錄者 䟽牘之剖本精書者 碑字牋札 他凡得意揮灑 或楷書或潦草 動如玉索銀筋 虎跳龍躍
謹嘗牒而櫝之 八九帙矣 一代名勝寄贈還往手蹟幷息祖遺筆十數帖 今皆盡之矣 讀執事書 若有甚曠慕者 不可不詳以報告 想當爲之太息惋然也 李衢隱獻淳
曰愚嘗從事鉛槧於先輩事蹟 有意講究 至及門諸賢 尤所致詳 獨於黃松澗先生實德 懵然也 及得遺集而讀之然後 乃知澗翁有如此之幽蘊也 其文章之俊偉 器度之簡嚴
操履之高潔 德儀之充厚 灼然可考於爛墨敗紙之中而有不可掩者 至若道谷之讀中庸也 往來質問於立雪之門 講磨麗澤於闕里之孫 則眞工實業之所存 可見矣
以陶山感懷詩言之服膺師門深覰光霽之眞境 感慨遺祠永憂衣鉢之嫡傳 則其精詣卓識之所造 又可以想像彷佛矣 特以愼黙謙退爲旨訣 不欲求知於人 而後來本孫
仍守鞱晦之家法 未嘗苟闡其先美 且其遊從之好 多在京洛 而於嶺中未免齟齬 故嶺下人士 或未之聞知耳 夫尙論先輩 何必以許多文字乎 漢之董子
以正誼明道一言而獲醇儒之稱 唐之韓公 以闢老佛一篇而爲斯文之徒曾氏之門 有不讀書之高弟 朱夫子有何必動形筆硯之訓 盖澗翁之感懷一詩 固已不爲不多而往復書札之不傳
亦豈害爲陶門之高弟耶
후손 용한(龍漢)이 정이간(鄭易簡)에게 답한 편지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초봄에 집사께서 저의 집안에서 선조의 서적이
불타는 재앙[絳雲之災]1)을 만났기 때문에 멀리서 욕되게도 위로의 편지를 주셨는데, 어찌 그리도 깜짝 놀라하며 한탄하셨는지요. 저희들은 선조의
덕업이 쇠락함을 위로하지 못했으니, 이미 무사히 받들어 보전하지 못하고 또 이 몸이 큰 화재와 함께 죽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홀로 황망히
잿더미 속에서 두려워하며 하소연 할 곳 없었는데, 이에 집사께서 슬퍼하고 가련히 여기시고 슬퍼할 뿐만 아니라 또한 멀리서 가르침을 孫吳未學
손빈(孫臏)과 오기(吳起)가 배우지 않았다면 國恥誰雪 나라의 수치를 누가 풀었겠는가 詩書畧涉 시서를 대충 섭렵만 한다면 腐儒誰說 부유를 누가
깨우치겠는가 尋常老夫 보통의 노부로 늙어간다면 後裔何法 후손들이 무었을 본받겠는가 終歸拭案 끝내 책상만 문지른다면 觀之不足 볼 만한 것이
없으리라 春風芳草 봄바람 불고 향기로운 꽃 필 때 自笑而筆 스스로 웃으며 적노라 시와 글씨는 당대에 이름을 떨쳤으니, 묘갈에서 칭송한
‘시는 이백(李白)과 두보(杜甫)이고 글씨는 김생(金生)’란 말은 아첨하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저기에 손수 기록한 유고와 종이를 정확히 잘라
정서(精書)한 소독(䟽牘) 및 비석 글씨와 편지글이 있고, 따로 뜻이 있을 때마다 혹은 해서로 혹은 초서로 기록한 것은 움직임이 미려하고
웅혼하여 삼가 서첩(書帖)으로 만들어 간직했지만 한 때의 명현과 주고받은 편지와 조상의 유필 십 여첩은 지금 모두
없어졌습니 가은(衢隱)이헌순(李獻淳)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 일찍이 선배의 사적을 널리 조사하여 강구(講究)할 뜻이 있었는데,
<급문제현록>에 이르자 더욱 자세하긴 하였으나 오직 송간선생의 실덕(實德)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었다. 그러다가 유집(遺集)을
얻어 읽은 뒤에야 송간옹에게 이와 같이 그윽한 경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그 뛰어난 문장과 엄격한 기품과 고결한 조리(操履)와 두터운
덕의(德義)는 오래된 유집 속에서 분명히 상고할 만 하여 숨길 수 없는 점이 있었다. 그리고 도곡(道谷)에서 『중 1)서적이 불타는
재앙[絳雲之災] : 청나라 전겸익(錢謙益)의 장서실(藏書室) ‘강운루(絳雲樓)’에 귀한 책이 많았는데 화재로 모두 소실되었기 때문에, 흔히
서적이 불에 탄 경우에 비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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