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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편 -訥齋集 -

 

 祭先師退溪先生文 與朴士憙聯名1)

維隆慶五年 歲次辛未 正月甲子朔 越六日己巳 門人金生溟 謹以淸酌之奠 敬祭于 退陶晩隱 眞城 李先生之靈. 嗚呼 先生江海精神 光岳正氣 才全行篤 道卲德備. 白玉無瑕 冰壺出壑 況潛性理 探究道學. 李杜詞章 鍾王筆畫 尋常不言 言必中式. 終日危坐 動遵禮法 伊川表儀 紫陽氣習 泉石膏肓 烟霞痼疾. 如予無狀 以志爲尙 夙於門下 誘掖勸獎. 許以忘年 叨陪函丈. 野寺山房 無往不逐 四時藏修 從容講讀. 鶯啼綠柳 花發春山 提挈壺榼 携人童冠 臨溪獵魚 登嶺探花 擧盃互飮 得句相哦. 歲在甲午 乃擢科第 出八金馬 通籍是繫 隨波强從 非其本意. 乞求外郡 欲退之志. 丹山未幾 移任基川 二千石祿 弊屣棄捐 歸來退溪 田園如昨 出游陶山 忘機伴鶴. 數椽書堂 三間精舍 滿壁黃卷 尋繹無暇. 蕭然忘惓 何間物我. 多士聞風 自遠方來 登接龍門 問道追陪 指導開曉 各因其才. 明廟臨朝 七辟三徵 崇資顯品 日加月增 牢固辭讓 草芥富貴 貪位之徒 慕祿之類 顔厚面靦 神慄膽悸. 今我 聖上 至誠欲致 辟書踵門 驛騎喧谷. 頃歲强起 趍拜 北闕 時時引見 問難釋疑 天語怡愉 喜得明師. 特加亞相 朝議僉同 聖學十圖 藥石 聖躬. 陳疏懇乞 去來菟裘 如釋重負 安養體軀. 非忘一世 庶激鄙夫. 而今而後 鄕有先生 百年陪話 幷將終齡 不幸先生 有斯疾也. 諸生問候 奔走晨夜 造物多猜 百藥莫贖. 慟矣一夕 遽爾易簀 子爲縣宰 孫亦生員 爲父何恨 爲祖何寃. 悲時迫阨 去而騰騫 上界闕人 天脫其轅 玉京樓成 帝召修文. 氣埃萬丈 肯顧囂煩 大小同悲 賢愚共惜. 道伯上聞 九重駭愕 眷憐嗟嘆 追贈極爵. 促遣內臣 別加褒揚 爲善得福 沒而有光 國無斯人 我民無祿. 元龜一失 吉凶誰卜 泰山旣嶊 小子奚仰 嗚呼 已矣 曷不悽愴. 平日別墅 變作殯幕 余懷之傷 天地之識. 繞廬三匝 爲慟何極.
유(維) 융경(隆慶) 5년(1571, 선조4) 세차(歲次) 신미(辛未) 정월(正月) 갑자삭(甲子朔) 월(越) 6일 기사(己巳)에, 문인(門人) 김생명(金生溟), 박사희(朴士憙) 등은 삼가 맑은 술로 전찬(奠饌)을 삼아서 퇴도만은(退陶晩隱) 진성(眞城) 이(李) 선생의 존령(尊靈)에게 공경히 제사를 올립니다. 아 선생은 강해(江海)의 정신과 광악(光嶽) 2)의 정기(正氣)를 타고 나서, 재주가 온전하고 행실이 독실하였으며 도(道)가 높고 덕(德)이 구비하였습니다. 백옥(白玉)같이 흠이 없는, 골짜기에서 따낸 얼음 항아리로서, 성리(性理)에 침잠(沈潛)하고 도학(道學)을 탐구하였습니다. 이백(李白)과 두보(杜甫)의 문장에다 종요(種繇)와 왕희지(王羲之)의 글씨였으며, 평소에 말이 없지만 말을 하면 반드시 법도에 맞았습니다. 하루 종일 꼿꼿이 앉아 있었으나 움직이면 반드시 예법을 따랐으니, 이천(伊川)의 의표(儀表)요 자양(紫陽)의 기습(氣習)으로, 천석(泉石)에 고황(膏肓) 고황(膏肓) : 고치기 어려운 병. 이 들고 연하(煙霞)에 고질(痼疾)이 되었습니다. 나같이 변변치 못한 자가 그 뜻을 숭상하고자 하여 일찍이 문하(門下)에 들어가 유액(誘掖)을 받고 권장(勸獎)을 받았습니다. 망년(忘年)의 사귐을 허락하여서 외람되이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야사(野寺)와 산방(山房)을 어디든 따라 다녔으며, 사철을 공부를 하며 조용히 강독(講讀)하였습니다. 푸른 버들에 꾀꼬리가 울고 봄날의 산천에 꽃이 피면, 술병과 찬합(饌盒)을 들고 아이와 어른들을 데리고, 개울에 나가 물고기를 잡고 등성이에 올라 꽃잎을 따서, 잔을 들어 서로 권하며 시구(詩句)를 얻어서 바꾸어 읊었습니다. 갑오년(甲午年)에 마침 과거에 급제하여 금마문(金馬門) 3)을 드나들며 통적(通籍) 4)을 하였으나, 세파(世波)를 따라 억지로 좇은 것이요 본래의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외군(外郡)을 걸구(乞求)하였으니, 물러나려는 뜻이었습니다. 단양군(丹陽郡)에서 얼마 안되어 풍기(豊基) 고을로 옮겼다가, 2천 석(石)의 작록(爵祿)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퇴계(退溪)의 물기슭으로 돌아오니 전원(田園)의 풍경이 옛날과 같았습니다. 도산(陶山)으로 놀이를 나가서 세속(世俗)을 잊고 학을 벗하였습니다. 자그마한 서당(書堂)과 몇 칸의 정사(精舍)에서, 벽에 가득 쌓인 책들을 연구하느라 겨를이 없었습니다. 소연(蕭然)히 권태로움도 잊었거니, 물아(物我)의 간극(間隙)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많은 선비들이 소문을 듣고 먼 곳에서 찾아들 와서는, 용문(龍門) 5)에 올라 수접(酬接)하면서 도(道)를 물으며 추수(追隨)하여 모셨으니, 가르쳐 인도하고 열어 깨우치기를 각기 그들의 재질에 따라 하였습니다. 명종 임금이 자리에 계실 때 여러 차례 징벽(徵辟) 6)이 있었는데, 높은 품계(品階)와 영현(榮顯)한 자급(資級)이 날로 더하여지고 달로 올라갔으나, 완강히 이를 사양하고 부귀를 마치 초개(草芥)와 같이 여겼으니, 지위를 탐하던 무리와 작록(爵祿)을 사모하던 부류들이, 두꺼운 얼굴에 낯빛이 붉어져서 심신(心身)이 전율(戰慄)하고 간담(肝膽)이 서늘하였습니다. 지금의 우리 성상(聖上)께서 지성으로 초치(招致)코자 하여, 징벽(徵辟)의 글발이 문전(門前)에 이어지고 역말이 골짜기를 훤전(喧傳)하며 달렸습니다. 그래서 연전(年前)에 억지로 일어나서 북궐(北闕) 7)로 나아가 배알(拜謁)하였는데, 때때로 불러보고 어려운 것들을 질문하였으니, 부드럽고 유열(愉悅)한 임금의 말씀이 밝은 스승을 얻은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특별히 아상(亞相)의 벼슬을 더하였으니 조정의 의논이 모두 같았으며, 그려 올린 『성학십도(聖學十圖)』는 임금의 몸에 약석(藥石)이었습니다. 상소를 올려 간절히 청해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니, 마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듯 편안히 몸을 보양(保養)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세상을 잊음이 아니오, 비루한 자들을 격려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부터 이후로는 향리(鄕里)에 선생이 있게 되었으니, 평생 모시고 말씀을 들으며 함께 여생을 마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선생께서 이런 병환이 나시고 말았습니다. 여러 유생(儒生)들이 예후(豫後)를 물으며 밤낮으로 분주하였으나, 조물(造物)이 시기가 많아서 백약(百藥)이 효험이 없었습니다. 애통하도다.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시다니. 아들은 고을의 원이 되었고 손자 또한 생원(生員)이니, 아버지로서 무슨 한이 있겠으며 할아버지로서 무슨 원통함이 있겠습니까? 슬픈 것은 시운이 곤박(困迫)해서 신선이 되어 올라가셨으니, 상계(上界)의 나라에 사람이 없어서 하늘이 이 세상의 멍에를 벗겼습니다. 옥경(玉京)에 누각(樓閣)이 이루어져서, 글을 지으라고 상제(上帝)가 불렀던 것입니다. 티끌 기운이 일만 길이나 되는데 시끄러운 속계(俗界)를 어찌 돌아다 보겠습니까? 대소(大小)의 관인(官人)들이 함께 슬퍼하고, 어진 자와 어리석은 자가 다같이 애석해합니다. 도백(道伯)이 위에 보고를 올리니 임금이 듣고 깜짝 놀라서, 못내 아쉬워 차탄(嗟歎)하면서 최고의 벼슬로 추증(追贈)하였습니다. 재촉하여 내신(內臣)을 보내어 포양(褒揚)하는 조치를 특별히 더하였으니, 선(善)을 행하면 복을 얻는다고, 돌아가신 뒤에 광영(光榮)이 빛이 납니다만, 나라에 훌륭한 분이 이젠 안 계시니 우리 백성들이 복이 없음입니다. 원귀(元龜) 8)를 잃어버렸으니 길흉(吉凶)을 어디 가서 물어보며, 태산(泰山)이 무너졌으니 소자(小子)가 누구를 우러른단 말입니까? 아 슬픕니다. 이제 그만 끝이 났으니, 어찌 처창(悽愴)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평소의 별장(別莊)이던 곳이 바뀌어 빈소(殯所)를 차린 여막(廬幕)이 되었습니다. 나의 이 아픈 마음은 천지(天地)가 알 것입니다. 세 차례 여막(廬幕)을 안고 도느라니, 통절(痛切)한 마음이 끝이 없습니다.
1)본 문건의 풀이는 『퇴계학 역주총서 29』(퇴계학 연구원, 2001.)에 실린 내용을 전게한 것임. 2)광악(光嶽) : 삼광오악(三光五嶽). 3)금마문(金馬門) : 조정을 드나드는 출입문. 4)통적(通籍) : 궁문(宮門)을 드나들 때의 검문 절차. 5)용문(龍門) : 학계(學界), 또는 사교계의 도덕적 명망이 있는 분의 사교장(社交場). 6)징벽(徵辟) : 나라의 초빙(招聘). 7)북궐(北闕) : 옛날 신하가 임금의 접견을 위해 대기하던 문루(門樓). 8)원귀(元龜) : 점복(占卜)을 위한 큰 거북. 나라의 원로(元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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