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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편 -訥齋集 -

 

 訥齋先生文集序(2)

君子以言行爲樞機 言顧行行顧言慥慥焉者 方是爲己之學也. 聖門諸子皆學聖人 而夫子以木訥許仁 亦可以見聖人之深意. 訥齋先生金公 早遊退陶老先生之門 天賦素訥 老先生喜曰 近仁之質殆君乎 旣許以近仁之質 則公之愼言行可知矣. 逮乙巳禍作 一時善類 芟夷殆盡 公獨翩然遐擧 遯跡林樊 苟非有得於危行言遜 能如是乎. 易曰知幾知微 先生盖有焉. 我從先祖謙庵先生 撰行錄備叙其出處本末 而間有缺文 是可慨也. 日後孫炳玹 裒遺文以成書 而囑不佞爲序. 不佞生晩且聞見淺陋 曷可以揄揚萬一 而其請至再三不倦 乃盥手敬讀曰 公天資甚高 聰悟絶人 早襲家庭之學 又就有道而正焉. 矧惟所居密邇 其所以親炙服膺 當何如也. 晩搆一屋於道巖之上 以遂其恬退之志 與一代諸賢 討論經籍講究不懈 其愛君憂國之忱 奉先惇宗之節 公之素所蓄積 又如是矣. 今據宣城誌云 篤志心學 隱而不仕 又曰從事于文純李滉之門以訥蒙獎 又崇賢祠樑頌 有傍傳家學 仙淸諸公之後 承其淵源 受授之正 百世公議也. 槩論公學問事業 不外乎訥言愼行. 內以三塘翁敎導之嚴 外以松隱公訓迪之方 卒乃歸宿於老先生 羽翼吾道 發揮經傳之功 又不細矣. 但遭時不倖 不能大鳴國家之盛 而遺文之僅存者 亦得於劫灰之餘 遂使至行實蹟 無由尋逐其始終 玆其非吾黨之恨耶. 諸仍昆欲壽其傳 克意收拾 是可尙也. 獻於是役也 竊有感 於事契之重 有不可以終辭者 謹依院錄 畧叙顚末如是 以歸之. 歲甲辰 淸明節 後學 前義禁府都事 豊山 柳道獻 謹序.
군자는 말과 행실을 추기(樞機)로 삼으니 말이 행실을 돌아보고 행실이 말을 돌아보기를 독실하게 하여야 바야흐로 자신을 위한 배움(爲己之學)이라 할 것이다. 성문(聖門)의 제자(諸子)들이 모두 성인을 배웠으되 공자[夫子]께서는 질박하고 어눌한 것으로써 인(仁)을 허여하셨으니 또한 성인의 깊은 뜻을 볼 수가 있다. 눌재 선생(訥齋先生) 김공께서는 일찍이 퇴도(退陶) 노선생(老先生)의 문하에서 노닐 적에 타고난 풍성이 평소 어눌한지라 노선생이 기뻐하며 말씀하시길 “근인(近仁)한 자질은 아마도 자네일 것이네.” 하셨으니, 이미 근인한 자질로 인정받았다면 공(公)이 말고 행실을 삼갔음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자 일시에 선류(善類)들이 거의 모두 해침을 당하였으나 공만은 홀로 훌쩍 멀리 떠나가 숲 속에 은둔하였으니 진실로 행실을 고결히하고 말을 겸손히 함에 있어 터득한 것이 있지 않았다면 그와 같이 할 수 있었겠는가!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기미를 알고 은미한 것을 안다.” 하였는데, 선생께서는 아마도 그러한 능력이 있으셨으리라. 나의 종선조(從先朝)이신 겸암(謙庵)선생께서 행록(行錄)을 지어 공의 출처본말(出處本末)을 갖추어 서술하셨는데, 간간이 빠진 글자가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어느 날 후손인 병현(炳玹)씨가 공의 유문(遺文)들을 모아 서책을 이루어서는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였다. 내가 후대에 태어났고 또한 견문이 얕고 고루하니 어찌 만분의 일인들 선양할 수 있겠는가마는 그의 청하는 정성이 두 번 세 번에 이르도록 지칠 줄 모름에 이에 손을 씻고 공경히 읽어보고 다음과 같이 쓰노라. 공(公)은 타고난 자질이 매우 높고 총오(聰悟)함이 절인(絶人)하였다. 일찍이 가정의 학문을 이어받고 또 도(道)가 있는 선생에게 나아가 자신을 바르게 하였다. 더구나 거처하는 곳이 매우 가까웠으니 직접 배워 가슴속에 새겨둔 것이 어떠하였겠는가! 만년에 도암(道巖) 곁에 집 한 채를 마련하여 염퇴(恬退)의 뜻을 이루고 한 시대의 어진이들과 더불어 경적(經籍)을 토론하며 강구(講究)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과 선조를 받들고 종가를 돈독히 대하는 절조는 공이 평소에 쌓아 기르던 바로써 또한 태만히 하지 않았다. 지금 『선성지(宣城誌)』에 의거해 보면 ‘심학(心學)에 돈독하게 뜻을 두어 은거해 벼슬하지 않았다’고 하였고 또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의 문하에 종사하여 ‘어눌함’으로 인정·격려 받았다’고 하였으며, 숭현사(崇賢祠) 들보에 새긴 송사(頌詞)에 ‘가학(家學)을 두루 전수받은 선청(仙淸) 제공(諸公)의 후예’라고 하였으니, 그 연원을 이어 받은 것이 방정(方正)하다는 것이 백세의 공의(公議)이다. 범박하게 공의 학문과 사업을 논해본면 어눌하고 행실을 삼갔다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안으로는 삼당옹(三唐翁)의 가르침이 엄하였고 밖으로는 송은(松隱)공의 훈계함이 반듯하더니 마침내 노선생(老先生)에게 귀숙(歸宿)하여서는 오도(吾道)를 돕고 경전(經傳)을 발휘한 공적이 또한 적지 않았다. 다만 때를 만남이 불행하여 국가의 융성함을 크게 선양하지 못하고 유문(遺文)으로 겨우 남아있는 것들도 전란 끝에 얻어진 것이어서, 공의 지극한 행실의 자취를 처음부터 끝까지 찾아볼 수 없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우리들이 한(恨)스럽게 여기는 바가 아니겠는가! 여러 후손들이 길이 전하고자하여 뜻을 모아 그것들을 수습하였으니, 이는 가상한 일이었다. 내가 그러한 일에 가만히 감동함이 있었고 사계(事契)의 중대성에 비추어 끝끝내 사양할 수 없는 바가 있는지라 삼가 원록(院錄)에 의거해 이와 같이 전말(顚末)을 간략히 적어 돌려보낸다. 갑신(甲申)년 청명절(淸明節)에 후학 전의금부도사 풍산 유도헌(柳道獻)은 삼가 서(序)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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