訥齋先生文集序(1)
訥齋先生 孝愛根於天 出處介于石 學問衣鉢於退陶夫子 而柳謙庵先生狀其德 吾祖淸陰先生 慕其遺芳 盖醇乎其儒者也. 惜其所著
不戒于火 後生無由攷其造道之至 先生後孫炳玹濩圭 掇拾於斷爛之餘 裒爲一卷 袖而示余 且請爲序. 余惟仲尼曰 剛毅木訥近仁 又曰 天下有道則行有枝葉
天下無道則言有枝葉 言非君子所先也. 是故顔閔不立文字 而洙泗諸子莫或跂焉. 我東寒暄一蠹從祀文廟 而何嘗多文字乎. 乃後之學者 文浮於實 勦襲成說 動輒汗牛
文愈多而道愈遠 曷足貴哉. 先生以近仁之質 專精於務本之學 涵養之深 踐履之篤 忘身之老而孶孶焉 其所以師範來世者 固在此不在彼. 使如先生者作於今日
則其訥言敏行之實 當力矯末學浮文之病矣 其肯屑屑於立言爲哉. 然則文字之傳不傳 固無加損於先生 而矧此一卷 猶可爲全鼎之一臠 威鳳之片羽. 詩曰 誠不以富
亦祇以異 其斯之謂歟. 歲壬寅 寒食節 從後孫 資憲大夫 弘文館學士 侍講院日講官 鶴鎭謹序. 눌재선생은 효성과 친애함이 천성에 뿌리두고 있었으며
나아가고 물러섬에는 절개가 돌[石]과 같이 굳었고 학문은 퇴계 선생으로부터 전수받아, 유겸암(柳謙庵)선생이 그 덕(德)을 형용하였으며, 우리
선조이신 청음(淸陰)선생께서는 그 유방(遺芳)을 흠모하셨으니, 진실로 순수한 선비이셨다. 애석하게도 저술들이 병화(兵火)에 조심하지 않아 없어져
후생들이 그 분의 도에 나아가신 경지를 고찰할 길이 없었는데, 선생의 후손인 병현(炳玹)과 호규(濩圭)씨가 이리저리 흩어져 남아있는 것들을
줏어모아 한 권을 만들어 옷소매에 담아와서는 나에게 보이며 서문을 부탁하였다. 내 생각건대 중니(仲尼)께서 말씀하시기를 ‘강하고 굳세며 질박하고
어눌함이 인(仁)에 가깝다’1)하셨으며 또 ‘천하에 도(道)가 있으면 행실에 지엽(枝葉)이 있고 천하에 도가 없으면 말에만 지엽이 있다’2) 고
하셨으니, 말은 군자가 앞세우는 바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안연(顔淵)과 민자건(閔子蹇) 3)은 문자(文字)를 짓지 않았으며 수사(洙泗)의
여러 제자들 가운데 그 누구도 혹시라도 힘쓰지 아니하였다. 우리나라의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1454~1504)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1450~1504)선생이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지만 어찌 일찍이 문자가 많았었던가! 후세의 학자들은 꾸밈이 실질보다
지나치고 남의 문장을 표절하여 자신의 학설로 삼아 걸핏하면 한우충동(汗牛充棟)의 양을 만들지만, 문장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더 도(道)와는
멀어지니 어찌 귀하게 여길만한 것이랴! 선생께서는 근인(近仁)의 자질로 근본에 힘쓰는 학문을 전일·정밀히 하여 함양함이 깊고 실천이 독실하며
자신이 늙는 것도 잊은 채 부지런히 노력하셨으니, 후세의 사범(師範)이 되는 것은 진실로 여기에 있지 저기에 있지 않은 것이다. 만일 선생
같으신 분이 오늘날 살아계신다면 눌언(訥言)·민행(敏行)의 실질로써 의당 말학의 꾸밈이 지나친 병폐를 힘껏 바로 잡을 것이니 어찌 자잘하게
입언(立言)하기를 달갑게 여기실 것인가. 그렇다면 문자가 후세에 전해지느냐 그렇치 못하느냐 하는 것이 진실로 선생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을 것이거니와 하물며 이 한 권은 오히려 솥에 가득한 고기 중 한 점이요 아름다운 봉황의 한 깃털이 될 수 있음에랴!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진실로 부유해서가 아니라 역시 다만 기이해서라네(誠不以富 亦祗以異)”라 하였는데, 그것은 이런 경우를 가리키는 것인가. 임인년
한식절에 종후손인 자헌대부 홍문관학사 시강원 일강관 학진(鶴鎭)이 삼가 서문을 쓰노라. 1)『論語』,「子路」편. 二十七章
2)『禮記』,「表記」편. 3) 안연과 민자건은 모두 덕행(德行)으로 유명한 공자의 제자들임. 『論語』,「先進」편. 二章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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