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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편 -洛川集 -

 

 洛川先生文序

南方學者 最盛於退溪南冥兩先正之世 蛋定脚跟 卓然自拔於流俗 不問可知爲雷龍門下士 而恂恂塗轍 不矯不徇 兼有得於陶山風旨 若洛川先生裵公是已 於乎 聞望微於昔 著述微於後 今去先生累百年 遺文散逸 百不一二 然一臠全鼎 獨不可誦其詩讀其書 知其人乎 况諸賢敍述 若旅老眉翁之信筆 盧寡悔許草堂之薦引推重 吳德溪李黃江申松溪之從遊講劘 尤可以觀其世也 盖先生幼而禀異姿 慨然以古道自期 未嘗屑屑爲章句之學 而判內外辨輕重 皭然不渾 又嘗就正於兩先生 審幾愼獨 窮理實踐 不空言 譚道不遺 世果忘 暫膺朝命 誠心訓蒙 出處之審 門路之正 操履之確 行義之篤 已爲一世之所歛服 而郭存齋之倡義殉忠 朴大庵之守死善道 俱出於門下 淵源授受 的有可據於乎 豈不韙哉 今其咳唾之寄在斷爛 若詩賦雜著 信手拈寫 自成一機杼 皆可誦也 然若只以是而求先生 毋或寂寥甚歟 雖然不可以無傳也 惜乎 後承零替 未卽爲不杇圖 近始編成兩규 附以輓讄行錄疏草呈文 將付剞劂 要余纂次之 余辭不獲 畧加丁乙 因書所感於心者 弁其首以塞慈孫之請兼寓景行之思云玄黓閹茂黃華節 後學前參判星山 李源祚 謹序
남방의 학자는 퇴계와 남명 선생의 시대에 가장 성대하였다. 일찍이 뒤를 이어 우뚝하게 유속에서 빼어나서 뇌룡문하의 선비가 될 만함을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순순히 자취를 따라서 어기지도 않고 과시하지도 않고 퇴계의 풍모와 학문을 얻었으니, 낙천 배신같은 사람이 이러한 경우이다. 아아! 옛날에도 명망이 미미했고, 훗날에도 저술이 미미하다. 지금 선생께서 살아 계실 때와 수 백년이 지나니 남기신 글들은 모두 흩어지고 백에 한 둘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솥안의 한 조각 고기로도 전체 맛을 알 수 있으니, 유독 그 사람의 시를 외우고 그 사람의 글을 읽지 않더라도 그 사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제현들의 저술, 예를 들어 장현광이나 허목의 친필, 노수신이나 허엽이 추천, 오건·이황강·신송계와 종유하며 강마한 것에서 그 세대를 볼 수 있다. 대체로 선생은 어려서부터 기이한 자질을 타고 났다. 개연히 옛날의 도를 이루겠다고 기약하고 문장이나 지는 공부는 좋게 여기지 않았다. 안팍을 판별하고 경중을 구별하는데 환하여 혼동됨이 없었다. 또 일찍이 두 선생께 나가 바로 잡아서 기미를 살피고 홀로 있을 때 삼가고, 이치를 연구하여 실천하였다. 헛말이 없었고 도를 이야기할 때는 빠뜨림이 없었고, 세상의 일은 과감하게 잊었다. 잠시 조정의 부름에 응해 나가서는 성심을 다해 교육을 하였다. 출처를 자세히 살핌과 문로의 올바름과 지조와 품행의 확실함과 의리를 실천하는 독실함은 이미 온 세상이 감복하였다. 존재 곽준이 창의하여 순국한 것과 대암 박성이 죽음으로 선도를 지킨 것은 모두 선생이 문하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니 학문의 연원을 수수한 것은 확실한 근거가 있으니 어찌 위대하지 않겠는가! 지금 문장은 온전치 못하게 남아 있어서 시와 부, 잡저와 친필은 절로 기축을 이루니 외울 만하다. 그러나 이것으로 선생을 알기를 구한다면 어쩌면 너무 적적하게 않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전하지 않을 수 없다. 애석하게도 뒤에 이은 사람이 없어서 영원히 남기기를 도모하지 못하였다. 근래에 비로소 두 책을 만들고 만사와 행록과 소초와 정문을 부록하여 판각하려고 하였다. 나에게 편집할 것을 부탁하였으나 내가 사양하지 못하고 대략 교정을 하고, 마음에 느낀 것을 써서 첫머리에 붙여서 자손들의 요청에 부응하고 사모하고 우러르는 마음을 붙이고자 한다. 임술년 9월 후학 전 참판 성산 이원조는 삼가 서문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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