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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편 -文峯集 -

 

上先生問目丙辰

前書所陳 至今思之 果有所誤 旣言在心在事一也 復曰 所謂一本者 但指理之總腦處而言爾 非指在心也 此言太誤 如此則是於在心之外 別有一物爲總腦也 先生答書有曰 方其靜也 渾然全具 固無在心在事之分 及其動而應接 事事物物之理 卽吾心本具之理 鄙意以爲方其靜也 非收合在事之理具於心也 此心所具之理 卽在事之理也 及其應也 非在心之理流出分去也 在事之理 卽在心之理也 答書之意 亦如此而已 所卞北溪之說 極荷諄示 前日每敎理字難知 當時亦未能深知其然 到今思之 果未易也 必消二三十年功力 庶可窺其一二也 若漫言理一 而未能眞知 則果無益也答 在心在事之說 看得透 知此則理之難知處 漸可融會矣
月受日光而明 月在地上 日入地下 其光由地四面空虛處射出而照月 然則日在地上 其光亦射下而照月乎 月受日光之時 日非無光也 其光固自若也 然則日在地上 則地下爲夜 日在地下 則地下爲晝乎 不然則是日光有明暗之時矣 仔細思量 日光不以地上地下而有異 則地下之隨日出入爲晝夜 無可疑矣 此意先儒未曾說破 伏望垂示答 日在地下 亦當明曜 只看其光之能射出而爲月之明 則可知矣 然冬爲四時之陰 地下爲地上之陰 地上日景 至冬而差微者 日非微也 窮陰使然耳 然則大地積陰之下 雖有光景 與出地爲晝者當有間 故易以明入地中爲明夷也
思慮動作 皆天也 此言思慮動作 非人之所能爲也 皆天理之自然乎 若言其所當然之理 則思慮動作之合於宜者 是也 然其所以思慮動作者 不可爲非理也 向與丁君胤禧論理氣之說 惟一謂思慮動作皆氣也 然豈無所以而然乎 曰 不然 思慮動作之合於宜 理也 所以能思慮動作者 氣之靈也 若以所以然者爲理則是有二理也 惟一當時 亦以丁說爲然 到今思之 是不然 思慮動作 果氣之靈 而氣之靈 亦豈無自而然乎 蓋丁意以爲若如此說 則是以理爲有二所以然 而不知此正是爲一也 如此言之 未知是否 朱子曰 知覺便是心之德 此言心之爲物 本自虛靈知覺也 若言其全德 則當曰仁者心之德乎心體包含 無所不具 仁固心之德 智亦不外於心德 知覺 知之事 故謂之心之德 何疑之有

앞의 편지에서 진술했던 것을 지금 생각해 보니, 과연 잘못된 점이 있습니다. 이미 마음에 있거나 일에 있거나 한가지라고 했으면서, 다시 이른바 하나의 근본이라는 것은 다만 이의 총뢰처를 가리켜서 말한 것이라고 한 것은 마음에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과연 크게 잘못되었습니다. 이와같다면 마음 밖에 달리 한 사물의 총뢰처가 있게 됩니다. 선생님께서 답서에서 “그 고요할 때 모두 갖추어져 있어서 진실로 마음에 있고 사물에 있는 구분이 없다가 움직여서 응사접물하게 되면 사물의 이치가 바로 내 마음에 본래 갖추어진 이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고요할 때에는 사물에 있는 이가 마음에 구비되지 않았습니다. 이 마음에 갖추어진 이가 바로 사물에 있는 이입니다. 사물에 응할 때 마음에 있는 이가 유출되어 흩어져 나간 것이 아니니, 사물의 이가 바로 마음에 있는 이입니다. 답서의 뜻도 이와같을 뿐입니다. 진북계의 논설을 반박한 것에 대해서는 매우 자세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전에 늘 이자는 알기 어렵다고 가르쳐주셨는데 당시에 또한 그러함을 깊이 알지는 못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과연 쉽지 않습니다. 반드시 이삼년은 공부를 더해야 그 한 두가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만약 가볍게 ‘이는 하나이다’라고 하고 참되게 알지 못한다면 과연 보탬이 없을 것입니다. 답 : 마음에 있고 사물에 있다는 논설을 꿰뚫어서 이것을 안다면 이의 알기 어려운 곳을 점점 마음으로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달이 햇빛을 받아서 밝습니다. 달은 땅위에 있고 해는 땅 아래에 있으니, 그 빛은 땅의 사면의 공간에서 빛이 쏟아져 나와 달을 비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해가 땅위에 있을 때에도 그 빛이 아래로 쏟아져 달을 비춥니까? 달이 햇빛을 받을 때 해는 빛이 없지 않으니, 그 빛은 진실로 그전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해가 땅위에 있을 땅 아래는 밤이 되고, 해가 땅아래에 있을 때 땅위는 낮이 됩니까? 그렇지 않다면, 햇빛이 밝고 어두운 때가 있는 것입니까? 자세히 생각해 보니, 햇빛은 땅위나 땅아래나 차이가 없습니다. 땅아래의 해가 나오고 듦에 따라 밤낮이 되는 것은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이 생각은 전의 학자들이 말하지 못했던 것인데, 가르침을 내려 주시길 바랍니다. 답 : 해가 땅 아래에 있을 때에도 밝게 빛나니, 그 빛이 비추어서 달의 밝음이 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겨울은 사시의 음이니, 땅 아래는 땅위의 음이 된다. 땅위의 햇빛이 겨울이 되면 조금 약해지는 것은 해가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음기가 다해서 그렇게 한 것 뿐이다. 그렇다면 대지의 음기가 쌓여있는 아래에 비록 빛이 있는 것이 땅위로 나와서 낮이 되는 것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역에서 밝음이 땅 속으로 들어가 명이가 된다고 한 것이다. 정자가 말한 ‘측은지심은 사람의 생도(生道)이다’라고 한 이 생자는 타고난다는 생자입니까? 사람의 마음은 본래 생겨남이 끝이 없다고 한다면 걸임금이나 도척같은 사람도 이 마음이 없을 수 없는데, 이 말은 걸임금이나 도척도 측은지심이 있기 때문에 움직인 것입니까? 답 : 측은지심은 사람의 생도라고 한 정자의 이 한 마디 말은 주자문하에서 세가지 변론이 있었다. 아래 문장에 상세히 보이니 참고하도록 하라. 대체로 이 생자는 다만 살아있다는 생자이니 생기고 생겨서 다함이 없다는 뜻이다. 곧 천지만물의 마음이 이 하나의 생자로 꿰뚫을 수 있기 때문에 주자가 혹문의 천지생물지심에 대답하기를 ‘천지의 마음은 다만 생일 뿐이니 모든 사물은 모두 이 생이고 바야흐로 이 사물이 있게 된다. 인물이 생기고 생겨서 다함이 없는 것은 생 때문이니, 생이 없으면 곧 말라 죽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걸임금이나 도척도 이 생이 없을 수 없으니 또한 산다는 생일 뿐이다. 보내온 편지에 생출의 뜻이라 하고, 또 동용의 뜻이라 한 것은 아마도 본의가 아닌듯 하다.
사려와 동작은 모두 천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사려와 동작이 사람이 능히할 수 있는 바가 아니고 천리의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말입니까? 만약 그 당연의 이를 말한다면 사려와 동작이 마땅함에 합치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사려와 동작이 되는 것은 이가 아니기는 불가합니다. 전에 정윤희와 이기설을 논할 때에 제가 ‘사려와 동작은 모두 기이다. 그러나 어찌 그렇게 시키는 것도 없는데 그럴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사려와 동작이 마땅함에 합치되는 것은 이이다. 사려와 동작을 하게 되는 것은 기의 신령함이다. 만약 그렇게 하는 것이 이라면 이것은 두 가지 이가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당시에는 정윤희의 말이 그렇다고 여겼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렇지 않습니다. 사려와 동작은 기의 신령함이니, 기의 신령함이 어찌 스스로 함이 없이 그렇게 될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정윤희의 생각이 이 말과 같다면 이것은 이가 두 개의 소이연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기고 이것이 곧 하나라는 것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주자가 말하기를 “지각은 곧 마음의 덕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마음이 물이 되어 본래 허령지각하다고 말한 것이다. 만약 덕을 갖추었다고 한다면 인이란 마음의 덕입니까? 답 : 심과 체에 포함된 것에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인이 진실로 마음의 덕이라면 지혜는 또한 마음의 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지각은 앎의 일이니, 마음의 덕이라고 말한 것이다. 무슨 의심스러움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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