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峯鄭先生文集序
山南學士大夫 講受老先生旨訣 有若程門之楊謝 朱門之黃蔡者 凡幾人哉 于時 文峯鄭先生獨秀出 以明敏之資 濟博洽之學
最爲師門所印許 其難疑而答問者 無非發天人性命之懿 其他如格物之釋 四七之辨 合衆知而仰訂於師席 垂爲定論者何限 不幸先生年未及中身而沒 其後後承寥落 文籍蕩佚
廑今二百有餘年矣 先生之殘香剩馥 邈然如雲霞之卷 而星月之沈 豈不爲人士之大恨哉 迺者 川城諸長老相與言曰 先生 吾鄕人也 先生之同門友 莫不有文集行于世
而獨先生否焉 責在吾輩 乃定裒稡有司二人 權君思浹 金君熙奮 皆志學之士也 遂旁搜遠剔 質之文獻舊家 參之本家爛藁 積以歲月 釐成三冊 詩集爲一卷
書札問目爲一卷 閑中筆錄爲一卷 先生所著續名臣言行錄 已就完秩 共十一冊 當別行于世 於乎 於此亦足以槩先生矣 先生之道 本之於身心 講之於師門 琢磨而淬礪之
疆健篤實輝光 日新其德矣 由是而玉署鑾坡 皆是道也 史院經幄皆是道也 最後延恩殿祔仁廟一疏 雖文不存 而亦是道之推 則觀於是集 雖不足以玩鳳之一羽
而豈不知五色之備乎 述道無能爲於是役 而旣感諸君子用心之勤 又感先生之裔孫宗璞獨能愿款慕先 不憚百里之遠 屢訪而屢懇焉 述道敢不揆愚拙 畧敍顚末如右
以俟後之君子續有考焉 而更有以發揮之云爾 上之二十三年己未仲冬 後學漢陽趙述道 謹序 산남의 학사 대부들이 노선생의 지결을 전수받아 정자 문하의
양시나 사량좌, 주자 문하의 황간이나 채침같은 사람이 몇 이나 되는가? 이 때에 문봉 정유일 선생이 특출하여 명민한 자질과 넓은 학문으로 가장
인정을 받았다. 그 어렵고 의문나서 문답한 것은 천인성명의 뜻이 아닌 것이 없었다. 기타 격물치지의 해석과 사단칠정의 분별같은 것은 중지를
모아서 스승에게 질정을 받아서 정론으로 삼은 것이 얼마나 많았는가? 불행히 선생께서 50세가 되기 전에 돌아가시고, 그 후손들은 영성하고
문적들은 흩어진 것이 거의 200여 년이 되었다. 선생께서 남기신 향기가 아득하게 구름이나 안개가 걷히는 듯하고 별과 달이 지는 것 같으니 어찌
선비들의 큰 한스러움이 아니겠는가? 근자에 천성의 여러 어른들이 서로 의논해서 말하기를 “선생은 우리 고향사람이다. 선생의 동문 벗들은 문집이
세상에 전해지지 않은 사람이 없는데 선생만 없다.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고 하고는 이에 부췌유사 2명을 정하였다. 권사협과 김희분은 모두
학문에 뜻을 둔 선비이다. 마침내 옆으로 찾고 멀리 찾아내고, 문헌이 있는 집안에 질정하고 본가의 원고를 참고하여 오랜 세월이 걸려 3책을
정리하였다. 시집을 한 권으로 만들고, 서찰과 문목을 한 권으로 만들고 한가할 때 적은 수필을 한 권으로 만들었다. 선생이 저술한 속명신언행록은
이미 완질이 되었으니, 모두 합하여 11책이 되었다. 당연히 세상에 특별히 간행해야 할 것이다. 아아! 이에 또한 선생을 개괄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의 도는 심신에 근본을 두고 스승에 강론을 받아 절차탁마하고 담금질 하였다. 강건하고 독실하며 빛이나 그 덕이 날로 새롭고 이로
말미암아 옥서와 난파가 모두 그 도이고, 사원과 경악이 모두 그 도이다.최후의 연은전에 인묘를 부묘하는 상소는 비록 글이 전해지지 않더라도 또한
이 도를 미룬 것이니 이 문집을 보면 봉황을 완상하는 하나의 깃털이 되기는 부족하지만 어찌 오색이 갖추어진 것을 모르겠는가? 나는 이 일에
능력이 없지만 이미 여러 군자들의 마음쓴 부지런함에 감동하고 또 후손 종박씨의 선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백리 길을 꺼리지 않고 여러번 찾아와
여러번 간절히 바람에 감격하여 내가 감히 졸렬함을 헤아리지 못하고 감히 전말을 위와같이 서술하였다. 후세의 군자들이 이어서 상고함이 있어서 다시
발휘하기를 기다린다. 금상 23년 기미년 11월 후학 漢陽 趙述道는 삼가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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