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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편 -錦溪集 -

 

 上退溪書2

一臥周南1) 留滯至今 證勢彌綿 未卜就路 令人鬱然 自辭後 斷置公事 來寓村舍 念間欲發 而虛弱已極 恐不能保其好還也 消息久斷 未審動靜何如 想今放杖陶山 有尋梅問柳之樂 徒自臥歎而已 且中書院位次事 已蒙記文之作 欲待譊譊之稍止 一番定次 爲未晩也 病適深纏 無暇念及外事 不免貽患於後之君子 前月中 偶有四隣名儒及吳子强2) 問疾而來 與一州儒士 咸會書院 宿留數日 柳光州亦與焉 僉曰不定位次而歸 後來者無敢議其可否 且儒生之入院 如無幀之寺 不樂游息 今與諸生圈其可否 則欲獨祠寒暄 正位南向者皆是 欲從祠文忠 坐之東壁者十餘圈 文烈則握珠手中 不可齒之學宮 非徒吾輩也 京外之論已定 斷不容復論矣 手珠之翁若議入祠 則諸生寧有納履而去 一院之中 無儒生之迹矣 翕而爲定論 諸生之論 亦未爲過當 竊念先生院記之文 儼然一學範也 自我而背先生之敎 有所不忍 執此而拒諸生之請 勢所難行 病懷尤撓 敢此馳伻 良意記文之作 出於盧侯煎迫之時 不及諸論紛紜之日 恐有更加商量處 如未十分是當 則改之亦未爲病 若諉以已定記文 不須更論 則恐滋中外諸生之惑 伏惟明敎何如 病中粗布一二 未得縷縷 代書草草 尤爲悚仄 間有二李之裔 亦有辭云 二李以鄕賢入祠 退溪之所定 盧侯之本意 非後進少年所可輕改 若欲尊寒暄 則正堂之北 別搆三間 以爲尊師之地 可也云云 一院而東有鄕賢祠 北有尊賢祠 恐勢不可行也 此亦何如何如 拜示敎 謹上稟狀
한 번 주남(周南)에 누웠다가 지금까지 머물렀지만, 증세(症勢)는 여전하여 길에 나다닐 수 있을는지 점치지 못하니 사람으로 하여금 울적하게 합니다. 사직한 후 공사(公事)는 일절 그만 두고 시골집에 내려와 머물러 있습니다. 스무 날 경[念間]에 나서려고 하지만 허약이 극에 이르렀으니 제대로 돌아가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소식이 오랫동안 끊어져서 동정을 알지 못했으니 어떻게 지내십니까? 생각건대 지금 선생의 도산(陶山)에는 매화와 버들을 찾아가는 즐거움이 있겠으니 그저 누워서 탄식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중간에 서원(書院)의 위패의 순서[位次]에 관한 일은 이미 기문(記文)을 받았습니다만, 시끄러운 여러말들이 좀 그치기를 기다렸으나 한 번 순서를 정해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병이 마침 깊이 들어서 다른 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으니, 근심을 나중의 군자에게 끼치게 됨을 면치 못하겠습니다. 전달에 우연히 사방의 명유(名儒)와 오자강(吳子强)이 문병을 와서, 한 고을의 유사들이 모두 서원에 모여 유숙하기를 수일 동안 하였는데, 류광주(柳光州)도 또한 참여하였습니다. 모두 말하기를, “위패의 순서를 정하지 않고 돌아가면 나중에 올 사람들이 그 가부를 감히 의논함이 없을 것이 아닌가? 또 유생들은 서원에 들어가는 것이 마치 영정이 없는 사원[無幀之寺]과 같아서 유식(遊息)을 즐기지 않을 것이다. 지금 제생들과 더불어 그 가부를 표시해 보라고 하니 오직 한훤(寒喧) 한훤(寒喧),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이다. 만을 정위(正位) 남향으로 모시자고 하는 사람은 모두이고, 문충(文忠)공 문충(文忠)공, 이조년의 손자인 이인복(李仁復)이다. 을 모시어 동쪽 벽에 좌치(坐置)시키자고 하는 이가 십여 사람인데, 문열(文烈)공은 수중에 구슬 문열공 이조년은 고려조 사람으로 그의 영정에는 손에 염주를 걸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주자학을 위주로 하는 서원에는 받아들여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을 잡고 있으니 학궁(學宮)에 나란히 모실 수가 없다. 우리뿐만이 아니라 경외(京外)의 여론은 이미 결정되어서 다시 논하려고 하지 않는다. 손에 구슬을 잡고 있는 늙은이[手株之翁]에 대해서 만약 입사(入祠)를 의론하면 제생들은 신을 꿰어신고 떠날 것이요, 일원(一院) 가운데에 유생들의 자취는 없어질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여러 의견들을)모아서 정론(定論)으로 삼는다면 제생들의 논의도 또한 과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선생께서 지으신 원기(院記)의 글을 엄연히 하나의 학범(學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부터 선생의 가르치심을 어기는 것은 차마 못할 바가 있습니다만, 이에 집착하여 제생들의 청을 거부하는 것은 형편상 행하기 어려운 바입니다. 병든 이 사람의 회포가 더욱 어지럽습니다. 감히 이에 사람을 선생께 보냅니다. 기문은 노후(盧侯)의 작품입니다. 시간이 급박하여 여러 이론들을 언급하지 못하였고, 나날이 정신없이 바빠서 아마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곳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십분 타당하지 않으면 또한 고쳐도 허물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이미 정한 기문에 맡겨서 다시 논하지 않는다면 아마 중외(中外) 제생들의 의혹이 자자할 것입니다. 밝은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병중에 조악하게 한 두 가지 말씀드렸고 자세히 설명하지 못하였습니다. 대서하여 바쁘게 적었습니다. 더욱 송구합니다. 그 가운데 두 이씨[二李] 두 이씨[二李], 이조년과 이인복 즉 문열공과 문충공. 의 후손이 있어서, 또한 말하기를, “이이(二李)는 향현(鄕賢)으로서 입사(入祠)하는 것이 퇴계의 정한 바요, 노후(盧候)의 본의이니, 후진이나 연소한 사람들이 가볍게 고칠 문제가 아니다. 만약 한훤(寒喧)을 존숭하려고 한다면 정당(正堂)의 북쪽에 별도로 삼간(三間)을 지어서 존사(尊師)의 터로 삼는 것이 가할 것이다. 운운”하였습니다. 그러나 중서원 동쪽에 향현사(鄕賢祠)가 있고, 북쪽에 존현사(尊賢祠)가 있으니 형세상 행할 수 없습니다. 이 또한 어떻습니까? 가르침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삼가 품장(稟狀)을 올립니다.
1)주남(周南), 낙양(洛陽)의 옛이름. 한양을 가리킨다 2)오자강(吳子强), 오건(吳健: 1521~1574)이다. 호는 덕계(德溪)이며 자강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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