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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편 -柏谷集 -

 

 操省堂先生文集序

孔門三千盡得天下英才 而魯獨以多賢見稱 何哉. 特以居近聖人 日親無隱之敎 昵侍申夭之儀 其董陶愉樂 比之遠來遐官者 固自有別矣. 玆故吾鄕操省堂金先生 卽所謂魯邦之君子也歟. 先生天品秀異 穎悟絶倫 八歲受學于月川翁 長從遊陶山門下 繁質疑禮. 篤學審思 以窮理致知返躬踐實 爲根坻 操存示察爲節度 常曰吾人自處 宜大不宜小 可高不可下 其立志如此. 而又與馬川汾川琴氏吳氏諸君子 日傅巖軒 互相切磋者乎. 由其體無不曰 大所以用無不周. 今略擧而論之 龍灣著勤王之績 莊陵修禁夢之庵 儐接天將 王人許國士之風 督耕山南 滿民賀父母之臨 頒料均而士卒歌. 炳幾先而名節完 逮夫凶人詆誣兩賢也 促起士路以遏其方張之勢. 晩年卜築臥雲臺上 漁釣倘伴 蕭然若一寒士 蹟其生平 眞可謂儒門之秀 淸朝之賢也. 不幸累經鬱役 凡師友往復講道論理等書 蕩然無存 今其零碎收拾者 殆泰岳之一毫 其作皆冲澹典雅 粹然性情中流出 決非後世雕繢逞巧者比也. 後孫遇洛胤元永燦等 將繕寫付剞劂 責一言以弁之 固辭不獲則作而曰 噫 夫子之時 周禮立魯 然世猶且以强弱論齊魯 陵夷至於戰國功利 嬴秦焚坑之日 天下不復知有魯. 然咸陽猶有誦法孔子者 魯城猶聞絃誦者 盖以遺風之未全泯而傳守之當有人也. 挽近吾鄕儒風寖漠 爲士者 自不覺其身之居立何地 如使此稿刊行 而讀之者因以想像昔日之魯 庶勉傳守之道 則豈非斯文之大幸耶. 通訓大夫 前行弘文館 副校理 知製敎兼經筵侍讀官 春秋館記註官 東學校授 眞城 李晩煃 謹書.


공자(孔子)문하 삼천 명의 제자는 천하의 영재(英材)들을 모두 얻은 것인데 노(魯)나라만 유독 ‘어진 이가 많다’고 일컬어짐은 어째서 인가. 특히 거처가 성인(聖人)가 가까워 날마다 직접 ‘숨김이 없는 가르침[無隱之敎]’1)을 받고 ‘활짝 펴시고 온화한 모습[申夭之儀]’2)을 가깝게 모시어 그 훈도(薰陶)가 화락함에 먼곳에서 온 사람과 비교해보면 진실로 저절로 구별됨이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을의 조성당 김 선생은 바로 이른바 노나라의 군자(君子)라 할 것이다. 선생은 타고난 성품이 남다르게 빼어나고 영오(穎悟)가 절륜하여 8살 때 월천옹(月川翁)에게 수학하였으며 성장하여서는 도산(陶山)의 문하에서 노닐면서 의심스러운 예법에 관해 자주 질문하였다. 돈독히 배우고 정밀하게 생각하여 이치를 탐구하고 앎을 지극히 하였으며, 자신에게 되돌려 실천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고 조존시찰(操存示察)함을 절도로 삼아 항상 말하기를 ‘우리들은 자처하기를 마땅히 크게 할 것이요 작게 하여서는 안되며, 높게 할 것이요 낮게 하여서는 안된다’고 하였으니, 뜻을 세움이 그와 같았던 것이다. 또 마천(馬川)․분천(汾川)의 금(琴)씨, 오(吳)씨의 여러 군자들과 날마다 암헌(巖軒)3)선생을 스승으로 하여 서로 절차탁마하였음에랴. 그러한 바탕으로 말미암아 커서 쓰임에 두루하지 않음이 없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지금 대략 거론해 논해 본다면, 용만(龍灣)에서는 왕사(王事)에 근면했던 공적이 드러났으며 장릉(莊陵)옆의 금몽암(禁夢庵)을 수리하였고 명(明)나라 장수의 접반사(接伴使)가 되어서는 명(明)나라 사람들에게 국사(國士)의 풍모가 있다고 인정받았으며, 영남(嶺南)의 경독관(耕督官)이 되어서는 모든 백성들에게 부모와 같은 은혜를 베풀고 급료의 지급을 고르게 하여 사졸(士卒)들이 구가(謳歌)하였다. 또 기미를 밝게 먼저 알아 명절(名節)을 온전히 하였으며, 흉인(凶人)이 두 어진이를 근거없이 비방할4) 때를 당해서는 서둘러 사로(士路)를 일으켜 바야흐로 뻗어나려는 기세를 막았었다. 만년에 운대(雲臺) 옆에 거처를 짓고 낚시를 하며 한가로이 지낼 적에는 쓸쓸하기가 마치 가난한 선비와도 같았으니, 그 일생의 자취를 좇아보면 진실고 유문(儒門)의 빼어난 이요 맑은 조정의 어진이라고 이를 만 하도다. 불행히도 여러 차례 병란[鬱役]을 겪으면서 사우(師友)간에 오고 간, 도리(道理)를 강론한 글들은 모두 없어지고, 이제 남은 것들을 수습해 보니 거의 태산 가운데 한 터럭에 불과할 정도로 적으나, 모두 충담전아(冲澹典雅)하여 순수한 성정(性情)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이 없으니 결단코 후세의 꾸미기만 교묘한 것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후손 우락(遇洛), 윤원(胤元), 영찬(永燦) 등이 장차 깨끗이 옮겨 적어 인쇄에 부치려 하면서 한 마디 말로 서문 써줄 것을 청함에 내 굳게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질 않아 다음과 같이 지어 말한다. “아! 공자(孔子)때에 주(周)나라의 예가 노(魯)나라에서 세워졌으나 세상에서는 오히려 강약(强弱)으로 제(齊)나라와 노(魯)나라를 논하더니 점점 쇠퇴해져 공리(功利)를 다투던 전국(戰國)시대와 진(秦)나라의 분서갱유(焚書坑儒)에 이르러서는 천하 사람들이 다시 노나라가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함양(咸陽) 땅에서는 오히려 공자의 말을 외우며 법도로 삼는자가 있었으니 노나라에서는 의당 여전히 거문고 울리는 소리가 들렸으리니, 대개 유풍(遺風)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아 전하고 지킴[傳守]을 담당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근래 우리 고을의 유풍(儒風)이 점점 쇠약해져 선비된 자가 스스로 자신을 어느 곳에 두어야 할지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데, 이 고본(稿本)이 간행되어 이것을 읽는 자가 이를 통해 지난 날의 노나라를 그려보고 전수(傳守)되어진 도(道)에 힘쓸 수 있다면 그것이 어찌 사문(斯文)의 커다란 다행이 아니겠는가! 통훈대부 전행홍문관 부교리 지제교겸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 동학교수 진성 이만규 삼가 씀.
1) 『논어(論語)』「술이(述而)」편 제 23장 참조. 2)『논어(論語)』「술이(述而)」편 제 4장 참조. 3) 암헌(巖軒)은 퇴계 선생이 기거하였던 암서헌(巖棲軒)을 말한다. 4) 정인홍(鄭仁弘)이 회재, 퇴계 두 선생을 무고하였던 일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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