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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편 -日休堂先生遺稿 -

 

 上退溪先生心經問目

人心道心章本註虛靈知覺 虛者 心之寂也 靈者 心之感也. 惟寂而能感 故有知覺之效. 蓋至寂而能感者 何也. 形氣之私 眞西山曰私猶言我之所獨耳 此說恐未瑩. 何如. 非惟精不可 惟精乃格物致知之事 而今看此文勢 似作必先由惟精而後能格物致知. 又致知後而格物先 今先致知 亦如何. 動不動 猶言動輒之意歟. 上帝臨女章勿貳勿虞 大文曰無 楊氏云勿. 恐勿字爲誤 何如. 閑邪存誠章頑 向蒙批敎云 頑風濕襲 手足爲痺 而血氣不流通之謂. 今考韻書 無如此釋者 而只曰心不測德義之經爲頑 又考痺字 只曰脚冷濕病 而不與頑通 然則何以痺釋頑 敢請其義. 敬以直內章本註盡其止直也 楊氏以俗所謂無僞爲直 與朱子無纖毫私意胸中洞然之說 不同 何也. ○樞要 戶之開闔必由於樞 書註曰衆體所會之謂要 盖言入聖所由之要也 未知何如. 想無止成有 困知記曰 魏伯陽參同契 將六十四卦 飜出許多說話 直是巧 其實一字也無所用. 故有敎外別傳之說. 後來張平叔說得亦分明 所謂工夫容易藥非遙說破 人須笑是已. 使吾朱子灼知其爲可笑 其肯留意於此乎. 然朱子之考訂此書 與註楚辭一般 盖當其時其所感者深矣 吾黨尤不可不知 是否. 咸亨聞於士友 多有發馬肝之論 每以先生敎辭應之 鮮有不解者. 故幷錄羅氏之說以祛俗學之躐等 未知如何. 嚴恪 先生批云 敬而太嚴之謂 李錄云 整齊嚴肅 偏於嚴厲 故非敬之正也 何如. 惕然悚然 悚惕之意同 而今作兩行說 如何分曉. 天命之性章己旣知止一箇知 程子曰人與我固分得 然而朱子答或說曰 己旣知則人必知之 故程子曰天地之知只是一箇知 程朱此說 似有相妨者 何也. 誠意章愼其獨 李錄云 首節旣言愼其獨 下文又重言之. 今人釋上獨字心所獨 故獨厓 下獨字身所獨 故獨乙 張謹曰 此恐不然. 首節獨字訓下 有陳定宇之說曰此指心所獨知而言 非指身所獨居而言 又於間居下有此身所獨居 而與上文己所獨知之獨不同. 今人多眩於此說 不察本意而强爲此說 殊不知定宇之說初非辨別上下獨字之意 只辨間居之義與愼獨之獨有別也. 此說未知是否. 君子樂得其道章打破這敬字 敬有甚形影而可欲打破. 正指其人而言 欲打去班列之意歟. 無量 世儒以爲飮之無限 非是. 不以幾器爲限而惟適於氣而已者歟. 人皆有不忍人之心章 朱子曰不忍之心 卽惻隱之心 又曰仁包三德 惻隱貫三端 故至下文因悉擧之 又曰忍是容忍不發之意. 饒氏曰人心慈愛惻怛 纔見人便發將出來 更忍不住 此說何如. 四端 或以四端爲情 或以七情爲情 人之情有二致歟. 向蒙垂諭云 人心道心不可謂七情四端 今云人心七情也 道心四端也 敢問其所以異. 牛山之木章 性情 於山則以性言 於人則以情言者 何也. 兼出入止有惡 兼猶言又也. 盖子重誤謂舍亡故出入無時莫知其鄕 先生於此論辨其誤 以爲不但如上文而已 兼又有下文所云何可謂是皆舍亡所致耶 盖出入兩字皆惡 則或如子重之說可也 入爲存爲善 出爲惡爲亡 何可幷指存而善者 爲舍亡之致耶. 鷄鳴而起章回互委止心機 回互與回護同 委曲俗有曲洞曰委巷 皆言回互 其身多設機心 不計是非也. 此乃無狀小人 而曰爲小人亦不索性者 如何. 養心章殺君與父也 嘗問如此樣人是乃王溥范質之類歟. 其後更思之 王溥之事未詳 范質作詩曰 我本羈旅臣 遭逢堯舜理 以堯舜禪讓比宋祖之得國 其心可知. 安知宋祖之弑君簒位 范爲之先也. 以此觀之 不可謂別於手弑也. 敢請指誨.


「인심도심장(人心道心章)」본주(本註)의 허령지각(虛靈知覺)에서 비었다는 것[虛者]는 마음의 고요함이요 신령스럽다는 것[靈者]는 마음이 느끼는 것입니다. 오직 고요하여야 능히 느낄 수 있는 까닭에 지각(知覺)의 효험이 있는 것입니다. 대개 지극히 고요하여서 능히 느낄 수 있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형기(形氣)의 사사로움(私)에 대해 진서산(眞西山)은 “사(私)는 ‘내가 홀로 하는 바’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는데, 그 설명이 분명치 않은 듯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대학』의 격물치지는) ‘정밀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에 대해 정밀함은 바로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일인데 지금 이 문세(文勢)를 보면 반드시 먼저 정밀함을 말미암은 뒤에야 격물치지를 할 수 있는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또 치지는 나중이고 격물이 먼저인데 지금 치지를 앞에 놓았으니, 또한 어떻습니까? 동부동(動不動)은 ‘움직였다하면 곧’이라는 뜻을 말하는 것과 같습니까? 「상제임녀장(上帝臨女章)」의 “네 마음을 둘로 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라(勿貳勿虞)”에 대해, 대문(大文)에서는 무(無)라 하였고 양씨(楊氏)는 물(勿)이라고 하였습니다. 물(勿)자가 틀린 듯 한데, 어떻습니까? 「한사존성장(閑邪存誠章)」의 완(頑)자에 대해 전에 가르침을 받을 적에 “완은 풍습(風濕)이 침입해 수족이 마비되고 혈기(血氣)가 통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하셨습니다. 지금 운서(韻書)를 상고해 보니 그렇게 해석한 것은 없고, 단지 ‘마음으로 덕의(德義)의 근본을 헤아리지 못함을 완이라 한다.’하였고, 또 비(痺)자를 상고해 보니 단지 ‘다리가 차갑고 습기가 있는 병’이라고만 하였으니, 그렇다면 어찌하여 비(痺)자로 완(頑)자를 풀이하신 것인지, 감히 그 뜻을 묻고자 합니다. 「경이직내(敬以直內)」장 본주(本註)의 “그 성심(誠心)을 다하여 거짓이 없는 것이 이른 바 직(直)이다”라는 구절에 대해, 양씨(楊氏)는 “세속의 이른 바 거짓이 없는 것을 직(直)이라 한다”고 하여 주자의 “털끝 만한 사사로운 뜻도 없어서 가슴속이 확 트인 것”이라는 말과는 같지 않은데, 어째서 입니까? 「추요(樞要)」에 대해서는, 지게문의 열리고 닫힘은 반드시 지도리를 말미암고 『서경(書經)』의 주석에 “중체(衆體)가 모여 있는 곳을 요(要)라고 한다”하였으니, 성인의 경지에 들어감에 따라야 할 긴요처를 말한 것이라 하겠는데,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무(無를) 생각하여 유(有)를 이룬다’는 구절에 대해 『곤지기(困知記)』에서 “위백양(魏佰陽)의 『참동계(參同契)』는 64괘를 가지고 여러 가지 얘기들을 만들어 냈으나 단지 교묘하기만 할 뿐 기실 한 글자도 쓸모 있는 바가 없다. 그러므로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는 말까지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장평숙(張平叔)이 제대로 분명하게 지적해 말하였는데, ‘이른 바 공부(工夫)는 쉽고 약(藥)은 멀리 있지 않다고 설파함으로써 사람들이 실소하였다’는 것이 그것이다. 만일 우리의 주자(朱子)께서 그것이 가소로운 것임을 분명히 알았다면 그것에 뜻을 두려고 하였겠는가? 그러나 주자가 그 책을 고정(考訂)한 것은 『초사(楚辭)』에 주(註)를 단것과 같이 아마 당시에 그것의 영향이 깊었기 때문일 것이니, 우리가 더욱 알지 않아서는 안될 것이다”라 하였는데 그렇습니까? 함형(咸亨)이 사우(士友)에게 들으니 유학에 해로운 논의가 있으면 언제나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으로 응대함에 이해하지 못하는 자가 드물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흠순(羅欽順)의 말을 함께 기록하여 속학(俗學)의 엽등(躐等)을 제거하려 하는데 어떨는지 모르겠습니다. 엄각(嚴恪)에 대해 선생님께서는 ‘공경스럽되 지나치게 엄격한 것을 말한다.’ 하셨고 『이록(李錄)』에는 ‘정제엄숙(整齊嚴肅)은 엄려(嚴厲)에 치우진 것으로 경(敬)의 바른 것이 아니다’라 하였는데 어떠한지요. 척연송연(惕然悚然)에 대해, 송(悚)과 척(惕)의 뜻은 같은 것인데 지금 둘로 설명을 하시니 어떻게 분별해 이해하여야 하겠습니까? 「천명지성장(天命之性章)」의 ‘기기지(己旣知)’의 지(知)자에 대해, 정자(程子)께서는 “남과 내가 진실로 나눌 수 있다”고 하셨으나 주자는 혹자에게 대답해 말하기를 “자기가 이미 알았다면 남도 반드시 알 것이다. 그러므로 정자가 하늘과 땅이 아는 것도 단지 동일한 앎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정자와 주자의 이러한 말들은 서로 맞지 않은 듯 한데 어째서 입니까? 「성의장(誠意章)」의 ‘신독(愼獨)’에 대해 『이록(李錄)』에서 “첫 구절에서 이미 신기독(愼其獨)을 말하였는데, 아래 글에서 또 거듭 그것을 말하였다. 지금 사람들은 위의 독(獨)자를 ‘마음이 홀로 아는 것’으로 해석한 까닭에 ‘독(獨)에’로 현토하고, 아래의 독(獨)자는 ‘몸이 홀로 거처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독(獨)을’로 현토한다. 이에 대해 장근(張謹)이 말하기를 「이는 아마 옳지 않은 듯 하다. 첫 구절의 독(獨)자의 훈고 아래에 진정우(陳定宇)가 이르기를 ‘이것은 마음이 홀로 아는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지 몸이 홀로 거처하는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다’하였으며 또 ‘한거(閒居)’ 아래에 ‘이것은 몸이 홀로 거처하는 것이니 윗 문장의 ‘기소독지(己所獨知)’의 독(獨)과는 다르다’고 하였다. 지금 사람들이 대부분 이 말에 현혹되어 본 뜻을 살피지 않고 억지로 이러한 주장을 하는데, 이는 진정우의 말이 애당초 위와 아래의 독(獨)자의 뜻을 변별한 것이 아니요, 단지 한거(閒居)의 뜻과 신독(愼獨)의 독(獨)에 구별이 있음을 변별한 것임을 전혀 몰라서이다.」”라 하였습니다. 이 말이 옳은지 여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군자락득기도장(君子樂得其道章)」에서 ‘저 경(敬)자를 깨뜨린다’고 하였는데, 경(敬)에 무슨 형영(形影)이 있어 깨뜨릴 수 있겠습니까. 바로 그 사람들을 가리켜 말한 것이니, 반열(班列)을 깨뜨리고자 한 뜻 입니까? ‘무량(無量)’에 대해 세유(世儒)들은 ‘술을 마시는데 한량이 없다’고 여기나 옳지 않다. 몇 잔으로 한계를 정하지 않고 단지 가운데 맞게한다는 것입니까? 「인개유뷸인인지심장(人皆有不忍人之心章)」에서 주자는 말하기를 “불인지심은 바로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라 하였고, 또 “인(仁)은 삼덕(三德)을 포괄하고 측은(惻隱)은 삼단(三端)을 꿰뚫는 까닭에 아랫 글에 이르러 측은을 근거로 모두를 거론하였다”하였으며, 또 ‘인(忍)은 용인하여 드러내지 않는 뜻’이라 하였습니다. 요씨(饒氏)는 ‘사람마음의 자애롭고 측달(惻怛)한 성질은 사람을 보면 곧 발출되어지는 것으로 참으려 해도 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어떻습니까? 사단(四端)에 대해, 혹자는 사단을 정(情)이라 하고 혹자는 칠정(七情)을 정이라 하니 사람의 정에는 두가지 이치가 있는 것입니까. 예전에 가르쳐 주시기를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을 칠정과 사단이라고 하여서는 안된다”고 하셨는데, 지금 “인심은 칠정이요, 도심은 사단이다”라고 하시니 그 다르게 된 이유를 감히 묻습니다. 「우산지목장(牛山之木章)」에서 성정(性情)과 관련해, 산(山)에 대해서는 성(性)으로 말하고 사람에 대해서는 정(情)으로 말한 것은 어째서 입니까? ‘겸출입(兼出入)에서 유악(有惡)까지’의 구절에서, 겸(兼)은 또[又]라고 말함과 같다. 대개 석자중(石子重)1)“놓으면 없어지기 때문에 출입에 일정한 때가 없고 그 방향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잘못 말하였으므로 선생이 여기서 그 잘못을 논변하여 “웟 문장과 같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 아랫 문장에서 말한 것이 있으니, 어찌 그것이 모두 놓아서 없어진 것의 소치 이겠는가. 대개 출입 두 글자 모두 악(惡)한 것이라면 혹 자중(子重)의 말과 같더라도 괜찮을 것이나 입(入)은 보존함이되고 선(善)이 되며 출(出)은 악(惡)이 되고 없어짐이 되니 어찌 보존하여 선(善)이 되는 것을 가리킨 것까지 아울러 놓아 없어진 것의 소치로 본단 말인가”하였습니다. 「계명이기장(鷄鳴而起章)」의 ‘회호위곡 비진심기(回互委曲 費盡心機)’에 대해, 회호(回互)는 회호(回護)와 같고 위곡(委曲)은 속언에 꼬불꼬불한 거리를 위항(委巷)이라 하니, 모두 ‘빙글빙글 돌림’을 말하는 것으로 자신이 기회를 틈타려는 마음이 많아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형편없는 소인인데도 ‘소인이라도 완전히 형편없지는 않은 자’라고 하는 것은 어째서 입니까? 「양심장(養心章)의 ‘살군여부야(殺君与父也)’ 구절과 관련해, 일찍이 이러한 사람은 바로 왕부(王溥)나 범질(范質)과 같은 부류가 아니겠는가 여쭈어 본적이 있었습니다. 그 후 다시 생각해보니 왕부의 일은 알수 없거니와, 범질이 지은 시에 “나는 본래 타국의 신하이거늘 요순(堯舜)의 다스림을 만나보았네”라 하여 요순의 선양(禪讓)으로 송조가 나라 얻은 일을 비유하였으니, 그 마음을 알 수가 있겠습니다. 송조가 임금을 시해하고 그 자리를 빼앗을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바로 범질이 앞 실마리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니, 그런 점에서 볼 때, 직접 임금을 시해한 것과 다르다고 할 수 없겠습니다. 감히 가르침을 청하는 바입니다.
1) 이름은 돈(墩) 혹은 대(憝)이며 자중(子重)은 자이다. 신창(新昌) 사람으로 호는 극재(克齊)이며 주자의 친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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