心經發揮序
人惟一心之微 而爲堯爲舜者在是 爲桀爲跖者在是 上焉而參天地贊化育者在是 下焉而同草木歸禽獸者亦在是 吁其可警也 夫要其幾
不越乎敬之一者而已 自堯舜精一之訓 而所以精之一之者 非敬矣乎 肅然如上帝之臨 惕然若君子之友 邪思閑而誠思存 忿思懲而慾思窒 善必遷而過必改 改又必於不遠
孰非以敬爲主乎 故聖人胸襟 曠然若無物 而答爲仁之問 則因材之篤 亦不出於克復敬恕 至於子思子之戒懼 子曾子之誠正 蓋無非敬焉 而求之禮樂之本 則亦敬也
鄒孟之所以寡慾存心 擴四端而充惡欲者 皆非敬而能焉乎 然而先古聖賢 實未有明言敬之一字 提掇而表章之 推之爲聖學之綱領者 爰自伊洛萬古道統之要 昭乎其有的矣
西山先生又歷選前後經傳之訓 編爲此書 以立心學之大本 於是敬之爲功於此心 益明且顯 使學者而無意於此心則已 如其有意 寧可一日一時之捨此書而他求乎
自堯舜以至於程朱 所以由此心而入聖域而參贊焉者 一開卷而秩然可見 凜乎若先聖先師之指示此心 吁其可敬矣 夫皇朝程篁墩爲之附註 而吾退溪李先生最愛此書
至於係後論於篁墩之書 而引魯齋神明父母之喩 西山之後 唯先生爲深知此書之味 而自西山而言之 亦未爲不遇後世之子雲矣 逑之愚陋 自少受讀 亦嘗親質於先生矣
唯其魯莽作輟 今且老而無得 誠此書之羞 而亦非書之過也 惟幸天誘其衷 酷嗜一念 尙不能自已於摧頹之餘 耿耿常思所以不終負此書者 隱微幽獨之中 蓋有欲已而不能者矣
常怪程氏之註 其所取舍 或多未瑩 至於程朱發明開示之大訓 頗多未入編中 不能不爲此書之遺憾 於是拈取表出 分門緝錄 其於敬之一字 則略倣西山之例 特加條詳
欲使人知程朱諸先生之反覆丁寧於此一字 其功如是 則當竦然思所以加勵 宜無所不用其力 不敢他求 皆所以爲羽翼此書之地也 諸先生之言而有註解之說 合當分脚細書
而緣不便老人之目 只空一字 以標其爲註而聯書其下 且附錄朱子太極圖說程子定性書伊川好學論橫渠西銘朱子仁誠等說與夫程朱行狀略 遂目之曰心經發揮 豈敢爲播示外人計哉
只爲便此殘年儉閱翫讀之資耳 因念昔者請問於李先生 至朱子血氣已衰 心志亦不復强之云 先生嘅然以爲朱夫子尙爾有此嘆 如我當如何 當時雖竊奉承而猶不能深知先生心事
今而眞知之矣 先生且云爾 則况我今日復如何哉 每到此段 未嘗不三復感歎 掩卷而忘言也云爾 萬曆癸卯秋八月壬辰 西原鄭逑序
사람은 미미한 하나의 마음으로
인해 모든 것이 갈려진다. 요(堯) 임금이 되느냐 순(舜) 임금이 되느냐 하는 것이 여기에 달려 있고 걸(桀)이 되느냐 도척(盜跖)이 되느냐
하는 것도 여기에 달려 있으며, 위로 천지와 함께 하고 변화와 생육을 돕는 것도 여기에 달려 있고 아래로 초목이나 다름없고 짐승의 수준으로
돌아가는 것도 여기에 달려 있으니, 아! 정말 정신을 바짝 가다듬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갈림길의 핵심을 따져보면 경(敬) 한 글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우선 정밀히 하고 전일하게 하라는 요순의 가르침에서부터 말하면, 마음가짐을 정밀히 하고 전일하게 하도록 하는 것이 곧 경이 아닌가.
하느님이 머리위에 가까이 있는 것처럼 엄숙하게 생각하고 도덕군자의 벗을 사귀는 것처럼 두려운 마음을 지니고서, 간사한 생각을 막고 진실한 생각을
보존하며, 불만스러운 생각을 경계하고 사욕을 막으며, 선(善)을 향해 옮겨가고 허물을 반드시 고치되, 당장 고쳐야 한다. 이와 같은 일련의 일들
가운데 어느 것이 경을 위주로 하지 않는 것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인의 가슴속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호호망망(浩浩茫茫)하지만, 인(仁)을
행하는 법을 묻는 제자들의 물음에 대답할 때는 각자의 타고난 자질에 따르면서도 사심을 이기고 예를 회복하라는 극기복례(克己復禮)와 경(敬)을
위주로 하고 서(恕)를 행하라는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자사(子思)의 눈으로 사물을 보기 이전에 경계하고 귀로 소리를 듣기 이전에
두려워한다는 계신공구(戒愼恐懼)의 가르침이나, 증자(曾子)의 마음이 처음 발동하는 것을 참되게 하고 이미 생긴 마음을 바르게 갖는다는
성의정심(誠意正心)에 이르기까지 경(敬) 아닌 것이 없으며, 예악(禮樂)의 근본을 찾아보면 그 또한 경이다. 그리고 맹자의 사욕을 줄이고 바른
본심을 지키며 의의예지 사단(四端)을 확대하고 증오와 욕심의 감정을 중도(中道)에 맞게 조절한다는 것도 다 경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먼 옛날 성현들 중에 사실 ‘경(敬)’이란 한 글자를 잡아내어 그 실체를 밝히고 더 부각시켜 성학(聖學)의 강령으로 만든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가 이락(伊洛 : 程顥․程頤)이 세상에 나옴으로부터 영원한 도통의 핵심이 환하게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되었으며, 서산
선생(西山先生 : 眞德秀)이 또 전후 경전의 가르침을 낱낱이 가려 뽑아 이 책을 엮어서 심학(心學)의 큰 근본을 세움으로써 ‘경(敬)’이라는
것이 마음을 수양하는 데에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졌다. 학문을 하는 자가 마음을 수양하는 데에 뜻이 없다면 그만이겠지만 만일 뜻이
있다면 어찌 하루 한시라도 이 책을 놓아두고 다른 것을 찾아서야 되겠는가. 요순으로부터 정자와 주자에 이르기까지 이 마음을 통하여 성인의 경지로
들어가 천지와 함께 나란히 서서 셋이 되어 천지간 만물의 변화와 생육을 돕는 모습을 이 책을 한번 펴 봄으로써 명쾌하게 알 수 있어서 독자가
공자․맹자 등 성현으로부터 직접 이 마음이 어떤 것이라는 가르침을 받듯 몸이 오싹해지는 엄숙함을 느끼게 되니, 진정 존경심이 절로 일어난다. 명
나라 정황돈(程篁墩)이 『부주(附註)』를 만들었고, 우리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이 무엇보다 이 책을 가장 좋아하여 황돈의 책에
후론(後論)을 달고 노재(魯齋 : 許衡)가 말한 ‘나는 『소학(小學)』에 대해 신명(神明)처럼 공경하고 부모처럼 떠받든다’는 비유를 인용하였다.
서산 이후에는 오직 선생께서 이 책의 맛을 깊이 알았던 것으로서 서산의 입장에서 말하면 후세에 자기를 진정으로 알아준 인물을 만나지 않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리석고 고루한 나는 어릴 적부터 이 책을 읽었고 또 일찍이 선생에게 의심나는 부분을 직접 물어보기도 하였다. 다만 끈기가
없어 그 공부를 하다가 말다가 하는 식으로 지냈으므로 지금 늙어 만년이 되었는데도 얻은 것이 없으니, 실로 이 책을 대하기에 부끄럽다. 그러나
이는 책 탓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나 자신의 잘못인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하늘이 내 마음을 돌보아 이 책을 깊이 좋아하는 생각만은 이렇게 늙도록
가시지 않아서 이 책을 끝내 저버리지 않겠다는 마음이 언제나 저 깊은 내면에 깔려 있었다. 이 때문에 이 책을 향하는 생각을 설사 끊어버리고
싶더라도 그럴 수 없었던 것이다. 항상 정씨(程氏)의 주석에 대해 이상한 생각이 들었던 것은, 그 취사선택을 한 기준이 간혹 분명치 않은 경우가
많았고 정자와 주자가 깊은 의미를 드러내 제시해 준 훌륭한 그르침에도 엮어 모은 속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이 상당히 많아 이 책의 유감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이리하여 거기에 빠진 사항들을 골라 취하여 드러내되 부문을 나누어 편집하였다. ‘경(敬)’ 한 글자의 의미에 관해서는
서산(西山)의 편집 방침을 대강 따르되 특별히 더 자세한 내용을 붙였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정자와 주자 등 여러 선생이 이 글자에 대해 이처럼
반복해가며 간곡하게 말씀한 공력을 들였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되면 분명히 마음을 가다듬어 더욱 힘써야겠다는 생각이 든 나머지
온 정력을 다 들이면서 감히 다른 무엇을 찾으려 하지 않을 것이니, 이로 볼 때 이 글은 모두 이 책에 도움이 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선생의 말씀으로 본문의 뜻을 풀이한 설이 있을 경우에는 마땅히 글씨를 두 줄로 작게 써야 할 일이지만, 그렇게 하면 노인이 읽기에는 불편하겠기에
다만 한 글자를 건너뛰어 그것이 주석이라는 것을 표시하고 그 밑에 나열하였다. 그리고 주자(周子)의 태극도설(太極圖說)과 정자(程子)의
정성서(定性書)․이천(伊川)의 호학론(好學論)․횡거(橫渠)의 서명(西銘)․주자(朱子)의 인(仁)과 성(性) 등에 관한 설(說) 및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행장략(行狀略)을 부록으로 편집하여 『심경발휘』라 이름 하였다. 이는 어찌 감히 바깥사람들에게 널리 내보이자는 생각에서 한
것이겠는가. 다만 내 자신이 이처럼 늘그막에 필요한 사항을 살펴보고 읽기에 좀 편하도록 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아울러 생각하니, 옛날 이
선생에게 『심경』에 관해 질문할 당시 ‘혈기가 이미 쇠약해지고 의지도 더 이상 강인하지 못하다’고 한 주자의 말에 이르러 “주 부자께서도 오히려
이러한 탄식이 있었는데 나 정도야 과연 어떻겠는가?”라 한탄하였다. 그 당시에는 비록 ‘그렇겠구나’ 하고 그 말씀을 받들어 이해하였으나 선생의
심중을 깊이 알 수 없었는데, 이제는 진정으로 알게 되었다. 선생도 그렇게 말씀하였으니, 더구나 나는 오늘날 또 어떻겠는가. 항상 그 문단에
이를 때면 서 번을 되풀이해 읽고 감탄하며 책을 덮고서 할 말을 잊지 않은 적이 없었다. 만력 계묘년(1603, 선조 36) 8월 임진일에 서원
정구는 서문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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