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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편 -悔堂集 -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論 癸卯

論曰 聖人之樂 亦多矣. 有仁智之二樂 有益者之三樂 樂則生者 樂其天而神也 樂忘憂者 味於道而樂也. 以至於循理安命樂 有餘於坦蕩 飮水曲肱 樂亦在於其中 則聖人之樂 亦多矣. 而獨以朋來自遠爲不亦樂乎者 奚哉. 蓋人性皆善 而覺有先後 我旣明善而人不能明焉 我旣復初而人不能復焉 則中心喜悅 雖極其至 而及人之樂 寧不有欠乎. 夫得五行之秀者人也 賦萬善之理者人也 而人已之所同得 物我之所共有 則豈一人之所得私 豈一人之所獨專者哉. 向也吾獨知是善 吾獨行是善 則徒悅而已 未足樂也 及夫告人而人信之 敎人而人從之 同聲相應 同氣相求 近者旣信而遠者亦信 近者旣從而遠者亦從 則以善及人 其樂何如也 信從者衆 其樂何如也. 大抵仁義禮智之性 原於天而寓於人 在父子而仁之理同得也 在君臣而義之理同得也 以至於夫婦而別之理均有焉 長幼而序之理均有焉. 吾身之所先知者 卽人所同得之仁義也 吾身之所獨得者 是人所共有之禮智也 人所同得之仁義而吾旣先得於己 則烏可不推其所得以及於人也 人所共有之禮智而吾旣先有於己 則烏可不推其所有以裕於人也. 我之所得 人亦得之 我之所有 人亦有之 自近而遠無不信之 自寡而衆無不從之 由前之獨悅而與人同樂 由吾之獨悅而與衆偕樂 則信所謂立必俱立 成不獨成 而其爲可樂 孰尙於是哉. 酣於仁義 飫於禮智 而樂父子君臣之道者 是樂也 樂夫婦長幼之序者 是樂也. 同類如此 一家可知 遠者如此 近者可知 宮啇相宣 不足以喩其懽忻之意也 律呂諧和 不足以方其宣暢之樂也. 然則是樂也 何樂也. 樂其以善及人者乎 樂其信從之衆者乎 善裕於己而有以及人 則是固可樂也 善及於人而信之者衆 則是尤可樂也. 己之善有以信於人 人之善有以資於己 講習相益而道以之日明 敎學相長而德以之日進 則天下無不可化之人 亦無不信從之人矣. 原其理 則我自樂其樂 彼亦樂其樂 而究其實 則我樂其及於人 而彼樂其資於我也 斯不亦人間大快活大懽適事也邪. 因是究之 樂云樂云者 非樂其人而樂也 樂其善之及人也 非樂其朋而樂也 樂其信從者衆也. 游聖門者三千 通六藝者七十 而成己成物 其樂融融 不厭不倦 其樂愉愉 則惟厥樂其善之及人而樂其信從之衆也者 孰有如吾夫子者哉. 噫小智自私之人 曷足以語此樂哉. 己有一善則沾沾自喜而不肯以告人 己有一能則揚揚自多而不肯以語人 其視君子之存心廣大 物我無間 推吾之所悅而樂人之有善者 正不啻百千萬里之相遠 焉知以善及人之可樂 又焉知信從者衆之爲尤可樂也哉. 嗚呼自夫子以後 能樂是樂者 幾何. 戰國之時 孟子樂之 其言曰 得天下之英才而敎育之 一樂也 宋之時 周程樂之 其言曰 每令尋仲尼顔子樂處 所樂何事 南渡之後 朱子樂之 其言曰 樂菁莪之長育. 自是厥後 樂是樂者寥寥矣 我願吾黨勵至誠無息之道 探聖賢實地之樂 不獨有善於己而必思推及於人 不獨有悅於己而必思同樂於人 使是樂克積而發越快適而酣暢 則聖人之樂 亦吾樂也 夫何遠之有哉. 雖然非樂道安仁之君子 富有於己而裕及於人者 則不足與於是樂矣. 謹論.


논(論)하여 말한다. “성인(聖人)의 즐거움은 또한 많기도 하다. 인의(仁義)의 실제를 아는 것으로부터 오는 즐거움1)이 있으며, 유익한 세가지 즐거움2)이 있으니, 즐거워하면 사친(事親), 종형(從兄)의 뜻이 생겨난다는 것은 그 자연스럽고 알 수 없는 신령스러움을 즐거워 하는 것이요, 이치를 깨달으면 즐거워하여 근심을 잊는다3)는 것은 도(道)를 맛보아 즐거워 한다는 것이다. 이치를 따르고 천명을 편안히 여기는 데에 이르러서는 평탄하고 여유가 있으므로 인해 즐거움에 남음이 있으며4) 물을 마시고 팔을 굽혀 베더라도 즐거움이 또한 그 가운데에 있다5)고 하였으니 성인의 즐거움은 역시 많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유독 벗이 먼 곳으로부터 오는 것은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말한 것은 어째서 인가? 대개 사람의 본성은 모두 선(善)하지만 깨달음에는 먼저하고 뒤에 함이 있으니, 나는 이미 선(善)을 밝혔지만 남들은 밝히지 못했고 나는 이미 그 ‘처음[初]’을 회복하였지만 남들은 회복하지 못하였다면 마음속의 기쁨이 비록 지극한데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남에게 미치는[及] 즐거움에는 어찌 모자람이 있지 않겠는가! 대저 오행(五行)의 빼어난 것을 얻은 것은 사람이며 모든 선(善)의 이치를 품부받은 것은 사람이니, 남과 내가 함께 얻고 남과 내가 공유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어찌 한 사람이 사사로이 할 수가 있을 것이며 어찌 한 사람이 홀로 마음대로 할 수가 있을 것인가. 앞서 내가 홀로 이러한 선(善)을 알고 내가 홀로 이러한 선을 행하는 것은 단지 기쁨일 뿐이니 즐거움이 되기에는 부족한 것이요, 남에게 일러주어 남들이 그것을 믿고 남에게 가르쳐주어 남들이 그것을 따르기를 같은 소리가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들이 서로 구하듯이 하여 가까운 자가 이미 믿음에 멀리 있는 자도 또한 믿고 가까운 자가 이미 따름에 멀리 있는 자도 또한 따르는 것은 선(善)으로 남에게 미친 것이니 그 즐거움이 어떠하겠으며 믿고 따르는 자가 많다면 그 즐거움이 어떠하겠는가. 대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본성은 하늘에 근원을 두면서 사람에게 깃들여 있는 것이니, 아버지와 아들사이에 있어서는 인(仁)이라는 이치를 사람이 함께 얻어 지니고 있고 임금과 신하 사이에 있어서는 의(義)의 이치를 함께 얻어지니고 있으며, 부부(夫婦)사이에 이르러서는 분별되어지는 이치를 고르게 지니고 있고 어른과 아이에게 있어서는 순서라는 이치를 고르게 지니고 있다. 내 자신이 먼저 알았다고 하는 것은 바로 사람들이 함께 얻어 지니고 있는 인의(仁義)이며 내 자신이 홀로 얻었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예지(禮智)이니, 사람들이 함께 얻은 인의(仁義)를 내가 이미 먼저 터득하였다면 어찌 그 터득한 바를 미루어 남에게 미치지 않을 것이며,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예지(禮智)를 내가 이미 먼저 자신에게 있게 하였다면 어찌 그 소유한 바를 미루어 남들을 넉넉하게 하지 않을 것인가. 내가 터득한 것을 남들 역시 그것을 터득하게 하고 내가 소유한 바를 남들 역시 소유하게 하여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곳까지 믿지 않음이 없으며 적은 사람으로부터 많은 사람까지 따르지 않음이 없어, 이전의 홀로 기뻐함으로 말미암아 남들과 즐거움을 함께하고 나의 홀로 기뻐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과 함께 즐거워 한다면 진실로 이른바 ‘섬[立]에 반드시 함께 서고 이룸[成]에 홀로 이루지 않는다’는 것이니, 즐거워 할 만한 것으로서 무엇이 이보다 더 하리요. 인의(仁義)를 즐기고 예지(禮智)에 배불러 부자군신(父子君臣)의 도리를 즐거워하는 것이 그러한 즐거움이요 부부장유(夫婦長幼)의 차례 있음을 즐거워하는 것이 그러한 즐거움이다. 동류(同類)인 사람끼리 이러하다면 한 집안의 경우는 알 수 있으며 먼 곳이 이러하다면 가까운 곳은 알 수가 있으니, 궁상(宮商)의 울려 퍼짐도 그 기꺼운 뜻을 비유하기에는 부족하고 율려(律呂)의 조화로움도 그 펼쳐나는 즐거움에 비견되기는 부족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즐거움은 어떠한 즐거움인가? 선(善)을 남에게 미침을 즐거워하는 것이 믿고 따르는 자가 많음을 즐거워 하는 것이다. 선(善)이 자기에게 넉넉하여 남에게 미침이 있다면 이것은 진실은 즐거워할 만한 것이요 선(善)이 남에게 미쳐 그것을 믿는 자가 많다면 이는 더욱 더 즐거워할 만한 것이다. 자기의 선(善)에는 남에게 믿어주는 바는 있고 남의 선에는 자기에게 도움되는 바가 있으니, 강습(講習)으로 서로 유익하게 하여 도(道)가 그로 인해 날로 밝아지고 교학(敎學)으로 서로 자라나게 하여 덕(德)이 그로 인해 날로 진보하게 된다면 천하에 교화시킬 수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며 또한 믿고 따르지 않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 이치를 근원적으로 따져보면 나는 스스로 나의 즐거움을 즐기는 것이고 그 역시 그의 즐거움을 즐기는 것이겠으나 그 실상을 궁구해 보면 나는 남에게 미치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이요 그는 나에게 도움을 주는 것을 즐거워 하는 것이니, 이것이 또한 사람 사이의 크게 쾌활(快活)하고 크게 기꺼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점을 근거로 궁구해 보면 ‘즐겁다 즐겁다’하는 것은 그 사람을 좋아해서 즐거운 것이 아니요 선(善)을 남에게 미침을 즐거워하는 것이며, 그 벗을 좋아해서 즐거운 것이 아니요 믿고 따르는 자가 많음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성인(聖人)의 문하에서 노닐던 자가 3000명이고 육예(六藝)에 통달한 자가 70명 이었는데, 자기를 완성하고 남을 완성시켜 그 즐거움이 융융(融融)하였으며 싫증내지 않고 게으르지 않아 그 즐거움이 유유(愉愉)하였으니, 그렇다면 선(善)을 남에게 미침을 즐거워하고 믿고 따르는 자가 많음을 즐거워한 사람으로서 그 누가 우리 부자(夫子, 즉 孔子)만한 분이 있었단 말인가! 아! 작은 지혜로도 스스로 사사롭게 구는 사람이 어찌 이러한 즐거움을 말할 수 있겠는가. 자기에게 한가지 선(善)한 점이 있다면 겉 모습을 꾸미며 스스로만 기뻐할 뿐 기꺼이 남에게 일러주지 않으며, 자기에게 한가지 재능이 있으면 으시대며 스스로를 대단하게 여길 뿐 기꺼이 남에게 말해주지 ###것을 군자가 마음가짐을 광대(廣大)이 하여 남과 나 사이에 틈이 없으며 자신이 기뻐하는 바를 미루어 남이 지니고 있는 선(善)을 즐거워하는 것과 비교해 보면 진실로 백천만리(百千萬里) 멀리 서로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니 어찌 선(善)을 남에게 미침이 즐거워할 만한 것임을 알 것이며, 또 어찌 믿고 따르는 자가 많음이 더욱 더 즐거워할 만한 것임을 알겠는가! 아아! 부자(夫子) 이후로 능히 이러한 즐거움을 즐길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되던가. 전국시대(戰國時代)때 맹자(孟子)가 그것을 즐기어 ‘천하의 영재(英才)들을 얻어 교육시키는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다’라고 하였으며, 송(宋)나라때 주자(周子), 정자(程子)가 그것을 즐기어 ‘언제나 중니(仲尼)와 안자(顔子)가 즐거워 하던 것을 찾아 즐거워하였던 바가 어떠한 일인지 찾게하였다’고 하였으며, 남송(南宋) 이후로는 주자(朱子)가 그것을 즐기어 ‘「정정자아(菁菁者我)」6)시의 인재(人材)를 키우고 기름[長育]을 즐거워한다’고 하였다. 그 이후로는 이러한 즐거움을 즐기는 자가 쓸쓸할 정도로 없는 지경이 되었다. 원컨대 우리들은 지성무식(至誠無息)한 도(道)에 힘쓰며 성현(聖賢)의 실제로 즐거워하였던 경지를 탐구하여 홀로 자기에게만 선(善)이 있도록 할 뿐만이 아니라 반드시 남에게 미루어 미치게 할 것을 생각할 것이요 홀로 자기에게만 기쁨이 있도록 할 뿐만이 아니라 반드시 남들과 즐거움을 함께 할 것을 생각하여, 이러한 즐거움으로 하여금 쌓여 밖으로 발산되어 쾌적(快適)하고 무르녹게 한다면 성인(聖人)의 즐거움이 또한 나의 즐거움이 되리니 무슨 멂(遠)이 있으리요! 그렇다고 하더라도(道)를 즐기고 인(仁)을 편안하게 여기는 군자로써 자신에게 풍부히 있게하여 그 넉넉함이 남에게 미칠 수 있는 자가 아니라면 이러한 즐거움을 함께 하기에는 부족할 것이다.” 이와 같이 삼가 논하노라.
1)『맹자(孟子)』,「이루장구상(離婁章句上)」, 제 27장 참조. 2)『논어(論語)』,「계씨(系氏)」편, 제 5장 참조. 3)『논어(論語)』,「술이(述而)」편, 제 18장 참조. 4)『논어(論語)』,「술이(述而)」편, 제 36장 참조. 5)『논어(論語)』,「술이(述而)」편, 제 15장 참조. 6)「정정자아(菁菁者我)」는 『시경(詩經)』「소아(小雅) 동궁지십(彤弓之什)」편에 속해 있는 시로서 인재 기름을 즐거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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