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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편 -悔堂集 -

 

 悔堂先生文集序

讀聖賢書 能了一句語 鮮矣. 吾夫子嘗言 弟子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文 此一章語 泛看若淺近 然究而論之 終身事業 俱在其中 雖世所稱宿德先生 能盡其行者 亦不多見之. 不佞近讀申悔堂先生遺稿及伯氏參奉公所編孝友錄 噫 先生其能盡其行者歟. 盖先生之至行 雖用學力以充之 大抵其天性也. 人生八歲入于小學 敎之以愛親敬兄之道 如黃香扇枕 陸績懷橘等事 朱夫子編諸善行 以爲千古人子之動. 若先生之采藥求醫 在十一歲未及成童之時 自是八年之間 衣不解帶 目不交睫 晝夜侍湯 冀得神明之感. 雖脩短有命天莫之回 而其視黃香陸績輩 其難易何如哉. 人少則慕父母 血氣衰則志隨而倦. 故孟子以大舜爲能五十而慕 公之侍疾母夫人也 以六十之年 日夜坐而抱侍 嘗糞而籲天 及其喪之 哭之如孺子. 不佞讀孝友錄 至此涕咽不忍復讀 使孟子而論公 豈不可曰是亦大舜之徒也乎. 君子之道 貴乎中庸 而孝子之事親 不自知其過 公之所行 或似疑於過 而皆出於至情之不能自已. 夫子之哭顔淵 猶曰有慟乎 抑非所以爲過也. 孝者百行之源 人能於大者盡焉 百行由此而推出故. 公之事兄盡其弟 居家極其和睦乎族 而敦乎鄕 其謹信而汎愛者 可知已. 又能力學究業 就有道而正焉. 立鄕約 設儒齋 創書院 以興起斯文爲己任 此則不徒出於天性而資於學力者 深矣 可謂好學篤行之君子也. 公之文章 得於餘力而存者 甚尠 令若干篇 然其一言一字之發 無非出於性情而民彛物則之所當然 就此亦可以得公之平生矣 奚多乎哉. 公之七世孫龍起 以門老之命 奉公遺稿 見屬以狀行者而又責以弁卷首焉. 不佞何人哉 顧可以當傳信之責 而爲佛頭之穢哉. 第其平日景公之至行 所謂執鞭而所欣慕者 不敢以固陋終辭 旣妄加編定 書其所感慨者如是 以爲悔堂先生遺稿序. 上之十五年 己未 季秋 庚午 後學 平原 李光庭謹叙.


성현(聖賢)의 글을 읽어 한 구절이라도 완전히 아는 경우가 드문 법이다. 우리 부자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길 “젊은이들이 들어와서는 효성스럽고 나가서는 공손하며 행실을 삼가고 말을 미쁨있게 하며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어진 이와는 가까이 해야 할 것이니, 이것을 행하고도 남은 힘이 있거든 글을 배우라.” 하셨는데, 이 한 장의 말씀은 범연히 보면 천근(淺近)한 듯 하나 궁구해 논해 본다면 일생동안 해야할 일이 모두 그 가운데 있으니, 비록 세상에서 숙덕선생(宿德先生)으로 일컬어지는 이라도 그것을 완전히 실행할 수 있는 자는 역시 많이 볼 수가 없을 것이다. 내가 근래에 신 회당(申 悔堂)선생의 유고와 백씨(伯氏)인 참봉공(參奉公)이 편찬한 『효우록(孝友錄)』을 읽어보니, 아! 선생께서는 완전히 실행하실 수 있는 분이셨도다. 선생의 지극한 행실은 비록 학력(學力)을 써서 확충된 것이기는 하지만 대개는 타고난 성품이셨다. 사람이 태어나 8세에 소학(小學)에 들어가면 그에게 어버이를 사랑하고 형을 공경하는 도리를 가르치는데, 황향(黃香)이 부모의 베개에 부채질하고 육적(陸績)이 어머니를 위해 귤을 품에 넣었던 일 등은 주부자(朱夫子)께서 「선행(善行)」편에 편집하여 영원토록 사람의 자식이 해야할 행동으로 삼으시었다. 선생께서 약을 캐고 의사를 구하였던 것은 11살 채 성동(成童)이 되기 전의 일로서 그때부터 8년간 옷의 띠를 풀지 않고 눈을 붙이지도 않으며 밤낮으로 약 시중을 들며 신명(神明)의 감동함이 있기를 바랬다. 비록 수명의 길고 짧음엔 명(命)이 있으며 천명을 되돌릴 수 없는 것이라고 하지만 황향, 육적 등과 비교해 보면 그 어려움의 정도가 어떠한가. 사람이 어려서는 부모님을 사모하다가 혈기가 쇠퇴하면 뜻도 따라서 나태해 진다. 그러므로 맹자(孟子)께서 위대한 순(舜)임금은 50세에도 어버이를 사모한다고 하였는데, 공께서 모부인(母夫人)의 병을 간호한 것은 60세 때로 밤낮으로 모시며, 변을 맛보고 하늘을 부르며 외치더니, 돌아가시게 되자 어린아이처럼 곡(哭)을 하였다. 내가 『효우록』을 읽다가 이 대목에 이르러서는 눈물이 나고 목이 메여 다시 읽을 수 없었는데, 만일 맹자가 공(公)을 논한다면 어찌 ‘이 사람 역시 위대한 순임금의 무리로다’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군자의 도(道)는 중용(中庸)을 귀하게 여기나 효자가 어버이를 섬김에는 스스로 그 지나침을 알지 못하는 법이니, 공(公)의 행실이 혹 지나치지 않은가 의심스럽기는 하나 그 모두가 그만둘 수 없는 지극한 심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공자(孔子)께서 안연(顔淵)의 죽음에 통곡을 하시고는 오히려 ‘통곡을 하였단 말인가’라고 하셨으니, 지나치다고 여기지 않으셨던 것이다. 효(孝)는 백행(百行)의 근본이니 사람이 큰 것에 대해 지극할 수 있으면 백행이 그로 말미암아 유출되어지기 때문이다. 공은 형을 섬기기에 공손함을 지극히 하였고 집안에서는 친족에 대해 화목함을 극진히 하였으며 마을 사람들과는 돈독히 하였으니, 행동을 삼가고 말에는 믿음이 있으며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또 능히 배움에 힘써 학문을 탐구하며 유도자(有道者)에게 나아가 질정하였다. 향약(鄕約)을 세우고 유재(儒齋)를 설치하고 서원(書院)을 창건하여 사문(斯文)을 흥기시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으니, 이것은 천성(天性)에서 나왔을 뿐만 아니라 학력(學力)에 힘입은 바가 깊은 것으로서 배우기를 좋아하고 독실하게 실천하는 군자라고 이를 수 있겠다. 공의 문장은 여력에서 얻은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이 매우 적어 몇 편 뿐이나 한 마디 말, 한 글자도 성정(性情)에서 나온, 민이물칙(民彛物則)의 당연한 바 아님이 없어 그것만으로도 또한 공의 평소 모습을 알 수가 있으리니, 어찌 많아야만 하겠는가. 공의 7세손인 용기(龍起)가 문중 어른의 명(命)으로 공의 유고를 받들고 와 행장(行狀)을 부탁하고 또 서문을 청하였다. 내가 어떤 사람인가 그저 전신(傳信)의 책임이나 감당할 수 있을 뿐이거늘 불두(佛頭)1)를 더럽힐 수가 있겠는가! 단지 평상시 공의 지극한 행실을 경모하였던, 이른 바 마부가 될 정도로 흠모하였던 사람으로서 감히 고루하다는 이유로 끝끝내 사양하지 못하여, 망령되이 편집 확정하고는 이와 같이 감개(感慨)함을 적어 회당선생 유고의 서문으로 삼는다. 상(上) 15년 기미(己未)년 늦가을 경오(庚午)일. 후학 평원(平原) 이광정(李光庭)이 삼가 서문을 쓰노라.
1) 불두(佛頭): 부처의 머리라는 뜻으로 ‘훌륭한 저서’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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