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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편 - 開巖集 -

 

開巖先生文集序

天地變化 草木蕃 五星聚奎 而吾道昌 天地之間 自有純剛至正之氣 當休明之世則盛大而流行 以之鍾生賢傑 以賁飾世道焉 於是 時地或有偏得其聚 而家或有偏値其盛者 若宋之洛建閩蜀 可謂偏得其聚 而程朱張呂王范蘇蔡 亦可謂偏値其盛者也 我朝文明之化 至弘嘉之際而極 於斯時也 是氣也偏聚於嶺南 而大賢出接千載不傳之統 而英賢接踵爲國家休詳 若聞韶金氏鶴峯東岡兩先生之家父子兄弟 並名於江之左右 其亦偏値其盛者 與開巖先生以七峯爲父東岡爲弟 而兄弟四人 俱以文學著稱 南冥曺先生 嘗譬之夷玉大玉焉 則其一時聲價 蓋可想也 先生在家 則以孝友聞 在朝則以忠直顯 其操心飾行 致君澤民 可見其所學者正 蓋嘗往來於退陶南冥之門 雖未及負墻摳衣以卒究大業 而其平生慕向而尊用者至矣 故其言論文章 光明俊偉 卓然爲諸賢之所推許 當是時 館閣之英 多在嶺南 如蘇齋栢潭嘯皐文峯藥圃德溪西厓鶴峯及先生兄弟 次苐彙征 贊襄啓沃 道行於上 猗歟盛矣 嘗聞先生論聖量未弘 上怒 詰其由 先生徐曰 卽此亦其一事 上爲之收威 賜醞而罷 若先生可謂善於敷奏 而君臣此際 其可復見耶 當時諸先生 俱有集 幾已刊行於世 而先生遺文 失之兵燹 今其存者 若干篇 子孫收輯爲上下卷 先生五世孫上舍汝鎔氏 跋其後 今上舍之子侄諸兄弟 不以不佞無似 辱示以遺稿 屬令訂正 而責其弁卷首者 噫 先生之後 才學文章 可謂盛矣 又當斯文諸老 無恙之日 不輕有所托 其愼重如此 若光庭者 其何敢當 抑先生之文章 其可傳而師法者 固宜充箱衍篋 而今其所編 若是寥寥 不能無後世之恨 然東岡先生之集 旣已行世 固與先生道同 而文與之上下 昔伊川先生撰明道行狀 而曰 求我者 於此足矣 後求先生之道者 亦不待遺文之行不行 又奚以不佞三寸喙哉

천지의 변화에 따라 초목이 번성하고, 오성이 규성에 모이자 유학의 도가 창성하였다. 천지 사이에 순일하며 굳세고 지극히 올바른 기운이 있는데, 밝은 세상을 만나면 성대해져서 유행하게 된다. 그래서 어질고 걸출한 인물을 낳아서 세상의 도리를 장식하게 된다. 이때에 시기나 지역으로 그 모이는 것이 편중되기도 하고, 가문에 따라 그 성대함이 편중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송나라 때 낙, 건, 민, 촉의 경우는 모이는 것이 편중되었다 할 만하고, 정씨, 주씨, 장씨, 여씨, 왕씨, 범씨, 소씨, 채씨의 경우는 그 성대함이 가문에 편중되었다고 할 만하다. 우리 조선의 문명의 교화가 홍치, 가정 연간에 이르러 지극해 졌는데, 이때에 이 기운이 영남 지역에 편중되었다. 큰 어진이가 나와서 천년토록 전해지지 않은 학통을 이었고, 영현이 이어 나와서 국가의 상서로움이 되었다. 예를 들어, 의성김씨 학봉 김성일과 동강 김우옹 선생 집안의 부형들이 낙동강의 좌우에서 이름을 나란히 하였으니, 그 또한 한 가문에 성대함이 모였다고 할 수 있다. 개암 김우굉 선생은 칠봉선생을 아비로 삼고 동강선생을 아우로 삼아 형제 네 명이 모두 문학으로 일컬어 졌다. 남명 조식 선생이 일찍이 夷玉과 大玉에 비유하였으니, 그 당시의 명성을 대체로 상상할 수 있다. 선생은 집안에 있을 때는 효도와 우애로 소문이 나고, 조정에 있을 때는 충성과 정직함으로 드러났다. 선생의 마음가짐과 행실, 긜고 임금에 충성하고 백성에 은혜를 베푼 것에서 배운 것이 올바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체로 일찍이 퇴계선생과 남명선생의 문하를 왕래하면서 비록 스승으로 모시면서 대업을 마치지는 못하였지만 그가 평소에 사모하고 존경함이 지극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언론이나 문장이 빛나고 뛰어나서 우뚝히 제현들의 추앙을 받았다. 이 당시에 관각의 뛰어난 사람은 대부분 영남사람이었다. 蘇齋, 栢潭, 嘯皐, 文峯, 藥圃, 德溪, 西厓, 鶴峯과 선생의 형제가 차례대로 무리지어 나아가 임금을 보좌하고 인도하여 위에 도가 행해지게 하였으니, 아름답고도 성대하였다. 언젠가 선생이 임금의 도량의 넓지 못하다고 논의한 적이 있는데, 임금이 듣고 화를 내며 그 연유를 물었다. 그러자 선생은 천천히 “바로 화를 내시는 것이 한가지 일입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위엄을 거두고 술을 하사하고 자리를 파하였다. 선생같은 이는 아뢰는데 뛰어나다고 할 수 있으니, 임금과 신하가 이 때에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의 여러 선생들은 모두 문집이 있어서 거의가 세상에 간행되었다. 그러나 선생의 유문은 전쟁과 화재로 잃어 버리고 지금 남아 있는 것 몇 편을 자손들이 모아서 상하 두 권으로 만들었다. 선생의 5세손 상사 김여용씨가 발문을 썼다. 지금 김여용의 아들과 조카형제들이 나를 못났다하지 않고 욕되이 유고를 보여주고 교정을 부탁하고 서문 써줄 것을 부탁하였다. 아아! 선생의 후손들은 학문과 문장이 성대하다고 할 만하다. 또 당시의 유가의 여러 어른들이 별탈이 없을 때 가볍게 부탁할 만한 곳이 없었으니 그 일이 신중함이 이와같다. 그러니 나 같은 사람이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선생의 문장은 후세에 전하여 모범이 될만한 것이 진실로 책상자에 가득했을 것이나 지금 편집한 것이 이렇게 영성하니 후세사람의 한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동강선생의 문집이 이미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진실로 선생과 더불어 도를 같이 하였고 문장은 막상막하였다. 옛날 이천 정이선생이 형인 명도 정호 선생의 행장을 지으면서 말하기를 “나를 구하는 것이 이것이면 충분하다.”고 하였다. 훗날 선생의 도를 구하는 사람은 또한 유문이 전해지고 전해지지 않는 것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니, 또 어찌 내가 세 치 혀를 놀리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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