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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편 -聚遠堂集 -

 

 聚遠堂先生文集序

明宣間 賢士大夫 鮮不薰炙陶山之化 淑氣之所鍾 時雨之所霑 被廊廟則黼黻宣輝 儒林則珩璜振響 而名花早凋 奇香易歇 秀而不實者有之. 若聚遠堂曺先生是已. 先生 芝山先生之兄也 甫成童 謁退陶李先生 請受心經 先生始訝其躐等 及叩所學 深器異之 同門諸賢 咸推服焉. 寒岡文穆公則曰 今得賢友 心無所恨. 東岡文貞公則曰 篤行士也 文爲國華 行爲人表. 高峯奇文憲 於人少許可 而每語人曰 世之學者 法可晦之文 師可晦之行 可以無弊. 又曰 可晦特立高行之人 其論心性 皆濂洛諸賢之言也. 可晦 先生字也 其見重如此. 先生旣早得依歸 以兩岡爲友 芝山爲弟 使之少暇以年 益加涵養切磋之工 則所成就豈可量哉. 夫以大聖之姿 尙云五十而知命 况先生年不及知命 而歿未幾 國被兵燹 遺籍盡蕩者哉. 殘膏剩馥之流傳至今者 詩僅三十篇 文止一篇 功令作二篇及世德錄七條附焉 惜乎 其傳者小也. 先生纔踰弱冠 成進士兩試 以死節者壽賦取大科 守成箴登重試 名聲動一世 不亦早自表見乎. 而恒曰 人寄此世 不過七八十年 甚促也 豈可獨保其甚促而不爲千百年計乎. 此其志豈安於小成而止哉. 逸步未展 瑞彩遽秘 世愈逖而名德寖晦 志士所以永欷. 然固陋如不佞者 尙能因此卷而想像其文章志行 追述於二百餘年之後 復安知此卷之更閱幾千百年 使先生之平日雅言 不至湮沒已也. 先生事親以鉅孝發聞 及釋褐 上顧諸左右曰 此非孝子曺某耶 聞其殉 爲之悼惜 命旌其閭 錄其行於三綱行實云. 公之八代孫緯文 袖遺稿 求序於不佞 遂書之 歸之如此. 泗水 睦萬中謹序.


명종(明宗)․선조(宣祖) 년간의 어진 사대부들로서 도산(陶山)선생의 교화를 입지 않은 이가 드물었으니, 그들은 맑은 기운이 모인 듯, 단비에 적신 듯 하여 조정에서는 보불(黼黻)이 훤히 빛났으며 유림(儒林)에서는 형황(珩璜)의 소리를 울려 퍼지게 하였으나, 이름난 꽃들 일찍 시들고 기이한 향기 쉽게 사라지듯 꽃은 피었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도 있었다. 취원당 조(曺)선생의 경우가 그러하다. 선생은 지산(芝山)선생의 형으로 겨우 성동(成童)의 나이에 퇴도(退陶) 이(李)선생을 찾아 뵙고 『심경(心經)』을 배우기를 청하니 선생이 처음에는 그가 엽등(躐等)하려는가 의심하였으나 배운 바를 물어 보고는 깊이 재주있다고 남다르다고 여기시었으며 동문(同門)의 여러 어진이들도 모두 탄복하였다. 한강(寒岡) 문목공(文穆公)은 “이제 어진 벗을 얻었으니 마음에 유감이 없다.” 하였으며, 동강(東岡) 문정공(文貞公)은 “돈독하게 실천하는 선비이다. 문장은 나라의 꽃이요 행실은 사람들의 모범이 된다.” 하였다. 고봉(高峯) 기(奇) 문헌공(文憲公)은 남들에 대해 인정하는 일이 적었으나, 언제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세상의 학자들이 가회(可晦)의 문장을 법도로 삼고 가회의 행실을 스승으로 삼는다면 폐단이 없을 것이다.” 하였으며, 또 “가회는 우뚝 서고, 고상한 행실이 있는 사람으로서, 그가 심성(心性)을 논하는 것은 모두 염락(濂洛) 제현의 말이다.” 하였는데, 가회는 선생의 자(字)이니 존중받음이 그와 같았던 것이다. 선생께서는 일찍 의지할 분을 얻었으며 한강(寒岡), 동강(東岡) 두 선생을 벗으로 하였고 지산(芝山)을 아우로 하였으니, 만약 몇 년의 수명을 빌려주어 함양절차(涵養切磋)의 공부를 더하게 하였다면 성취할 바를 어찌 헤아릴 수 있으리오. 대성(大聖)의 자질을 지닌 공자(孔子)께서도 오히려 50세가 되어 천명(天命)을 알았다1) 하였는데, 하물며 선생은 나이가 50이 되기전에 돌아가시고 돌아가신지 얼마 안돼 나라가 병란을 입어 남겨진 전적이 모두 없어져 버렸음에랴! 남아 있는 유문들 가운데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것으로는 시(詩)가 겨우 30편에 문(文)은 단지 한 편이고 공령문(功令文) 2편에 세덕록(世德錄) 7조목이 덧붙여 있을 뿐이니, 그 전해진 것이 적음이 애석하도다. 선생께서 20세가 갖 넘어 생원, 진사 두 시험에 합격하였고 「사절자수(死節者壽)」라는 부(賦)로 대과(大科)에 합격하였으며 「수성잠(守成箴)」으로 중시(重試)에 장원하여 명성이 세상에 진동하였으니, 또한 일찍 스스로를 드러내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항상 말씀하기를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것이 70년, 80년을 넘지못하니 매우 촉박하나 어찌 그 촉박한 것을 보존하고 있다고 하여 천백년(千百年)의 계획을 세우지 않으랴.” 하였으니, 그로 보면 그 분의 뜻이 어찌 소성(小成)에 안주하여 그치는 것이었으랴. 빼어난 행실 미쳐 펼치지 못하시고 아름다운 모습 갑자기 사라지셨으니, 시대가 오래되면 될수록 그분의 명덕(名德)이 점차로 가리워 질 것을 뜻 있는 선배들이 길이 탄식하였다. 그러나 나 같이 고루한 자도 오히려 이 책을 통해 그분의 문장과 뜻 그리고 행실을 그려볼 수 있어 200여년 뒤에 추술(追述)하니, 이 책이다시 수천백년 동안 읽혀져 선생이 평소에 하신 아언(雅言)들이 인멸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선생께서는 어버이를 섬김에 거효(鉅孝)로 알려져 등과한 후에는 상(上)께서 좌우의 신하들을 돌아보며 “이 사람은 효자 조(曺) 아무개가 아닌가”라고 말씀하셨으며, 돌아가셨음을 듣고는 슬퍼하시며 정려(旌閭)를 세우고 『삼강행실록(三綱行實錄)』에 그 행실을 기록하게 하시었다. 공의 8대손인 위문(緯文)의 유고를 가지고 와 나에게 서문을 구하기에 마침내 이렇게 적어 돌려 보내노라. 사수(四水) 목만중(睦萬中)이 삼가 서문을 쓰노라.
1) 『논어(論語)』「위정(爲政)」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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