跋
此我先祖忠翼公詩若文 目之曰栢谷先生集者也 惟我先祖蚤與弟寒岡公 受業退陶門 逮乎受知我穆廟 其德業之懿 功烈之盛 文章之美
著於儒林 載於國乘 見於詞家 古所稱三不朽者 我先祖實兼有之矣 第其遺集見逸於兵燹 今所存者 特文豹之一斑 然一臠足以識其全鼎 染脂者一目當別矣
何必編帙之多乎哉 上之二年乙卯 先祖外曾孫沈谷櫟氏宰昌平 始以遺集付剞劂氏 未訖功而遞歸 每爲之慨惜矣 今不肖謹摭舊所裒稡者及得於爲人傳誦者 與昌平公胤廷熙甫
叅互舊本 以正紕繆 撰次年譜 以資考閱 釐爲上下編 奉質于四宰閔公鎭厚 而鋟諸梓 嗚呼 先祖旣有此三不朽 固不待文集之傳不傳 而竊懼夫人代寢遠 而篇什寢逸
倘撤閔公尙德慕義之誠 則先祖之遺集幾乎不行于世矣 噫 後裔之於祖先 雖其服玩嗜好之物 猶將謹守而不忍廢 況乎詩文 其精神心術之所寓 則雖殘篇短牘
豈忍使泯沒而無傳也哉 其收輯而編摩者 實沈公父子所用心 而終始贊成之者 皆閔公力也 玆敢略敍顚末 以寓羹墻之慕云爾 崇禎紀元後八十三年庚寅仲春日 이 책은
우리 선조 충익공(忠翼公)의 시문집(詩文集)으로, 『백곡선생집』이라 불려진다. 생각건대, 우리 선조께서는 일찍부터 아우 한강공(寒岡公)과 함께
퇴계 선생의 문하에 수업하여 우리 목묘(穆廟 : 宣祖)의 장려를 받기에 이르렀는데, 그 덕업의 훌륭함과 공열(功烈)의 성대함과 문장의 아름다움이
유림에 드러나고 국사에 실리고 시단(詩壇)에 보이니, 예전에 이른바 ‘삼불후(三不朽)’라는 말을 우리 선조께서 실로 겸비한 것이다. 다만 그
유집이 병화(兵火)에 산일(散逸)되어 지금 남아있는 것은 유독 표범의 한 점 얼룩무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 점 고기로도 족히 그 솥 안의
요리를 알 수 있기에 음식을 맛보는 사람은 한 번 보면 마땅히 구별할 것이니, 어찌 책의 분량이 많을 필요 있겠는가. 금상(今上) 2년 을묘에
선조의 외증손 심곡(沈谷) 정력(鄭櫟) 공이 창평(昌平) 수령이 되어 비로소 유집을 판각했지만 그 일을 다 마치지 못하고 체직되어 돌아왔으니,
늘 그 때문에 개탄했다. 지금 불초가 삼가 예전에 수집한 것과 사람들에게 전송되던 것을 모아 창평공의 아들 정희(廷熙)군과 함께 구본(舊本)과
대조하여 오류를 바로잡고 연보를 정리하여 상고하여 살필 수 있는 자료로 삼았다. 그리고 상․하편으로 정리하여 사제(四宰) 민진후(閔鎭厚) 공에게
질정하여 인쇄하였다. 오호라! 선조께서는 이미 이 ‘삼불후’를 겸비했으니 진실로 문집이 전하고 전하지 않음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러나 가만히
걱정되기는, 대저 사람의 세대가 멀어질수록 작품이 더 산일되고 혹 덕을 숭상하고 의리를 사모하는 민공(閔公)의 정성이 없어진다면 선조의 유집이
거의 세상에 행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아! 후손은 선조에 대하여 비록 선조께서 몸에 지니고 다니던 물건일지라도 오히려 삼가 지켜 차마
없어지게 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시문(詩文)은 그 정신과 마음을 깃들인 것이니 비록 얼마 남지 않은 글이나 짧은 작품이라도 어찌 차마 민몰되어
전하지 않게 하겠는가. 수집하여 책으로 엮은 것은 심공(沈公) 부자가 수고했고, 시종 도와 완성한 것은 모두 민공의 힘이다. 그래서 이에 그
전말을 간략히 적어 갱장(羹墻)1)의 사모하는 마음을 붙인다. 崇禎紀元後八十三年庚寅仲春日 1) 갱장(羹墻) : 앙모(仰慕)하는 마음이
지극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옛날 요(堯) 임금이 죽은 뒤에 순(舜) 임금이 3년 동안 앙모하여 앉았을 때는 담장에서, 밥먹을 때는 국그릇에서 요
임금을 보았다는 말이 있다. 㰡後漢書㰡 「李固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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