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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편 -柏谷集 -

 

柏谷集序

昔歲龍蛇 島夷猖獗 肆然發射天之語而假途於我 我昭敬大王赫然而怒 斥其使而奏于帝 俄而賊兵蔽海而至 犯我都城 車駕西巡龍灣 謂羣臣曰 父母孔邇 庶抒我于艱 誰能爲我赴愬者 于時 栢谷鄭公挺身請往 上亟加嘉歎 慰諭而遣之 旣至 詣京都白其狀 仍痛哭於庭 石尙書大感動于心曰 古之申包胥 亦何以加此哉 遂入告于后 大發兵救之 皇威所加 凶鋒自挫 封疆克復 宗社再安 吾東方式至于今日者 秋毫莫非帝力 而鄭公至誠籲天之功 亦豈少哉 百年之間 滄桑屢變 神州陸沈 事有不忍言者 甲申春 我殿下以皇明露亡之回甲 益切匪風下泉之思 設壇禁中而親祀之 猗歟盛哉 其將永有辭於天下後世矣 顧公後裔零替 若敖之鬼不免餒 而賤臣鎭厚竊不勝衋然而傷 嘗於筵席 敢請官廩其主祀者 上傾聽而許之 聞者莫不感聳焉 一日 公之耳孫鍵 袖公詩文若干篇 來謁于不侫曰 吾祖巾衍之藏 散落殆患 其得保於兵燹者 惟有此耳 誠不忍湮没無傳 而家貧力綿 無以刊行 望子之終始垂德也 不侫再拜而受之 就加考訂 大司徒金公宇杭嶺南方伯洪公萬朝 聞風而相其役 乃付之剞劂氏 其中科場所製 非文集可載而一倂收入者 以公咳唾之餘 隻字猶爲可貴也 論禮之書 或不無可擬而不敢去取者 旣有退陶之答 後學難於容議也 觀者宜加察焉 不侫於公 實有曠世之感 今適謬膺使命 來赴燕京 由當日請兵之路 作虜庭輸幣之行 懷高風而已遠 撫吾身而潛北 俯仰怨憤 寧欲無生 只傾斯亭之淚 注之東海之波而已 噫 崇禎紀元之八十二年己丑孟春 崇政大夫 判敦寧府事閔鎭厚 謹序
예전 임진년에 왜구가 창궐하여 방자하게도 하늘을 거스르는 말을 하고 우리에게 길을 빌리자 하니, 우리 선조(宣祖)께서 크게 노하여 그 사신을 물리치고 명(明)나라에 상주(上奏)하였다. 얼마 후 적병이 바다에 가득 쳐들어와 우리 도성을 침범하자 임금이 서쪽 용만(龍灣 : 義州)으로 피난하고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부모는 매우 가까우니 거의 나를 어려움에서 구해줄것이다. 누가 나를 위하여 명나라로 가서 하소연 할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그 때 백곡(栢谷) 정공(鄭公)이 몸을 일으켜 가기를 청하니, 임금이 몇 번이나 가상하다 칭찬 하고 위로하여 보냈다. 명나라에 도착하자 경도(京都)에 이르러 그 상황을 알리고 이에 조정에서 통곡하니, 석상서(石尙書)가 마음으로 크게 감동하여 말하기를 “옛날의 신포서라도 또한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라 하고 드디어 황후에게 고하여 크게 병사를 내어 구원해 주었다. 명나라 군대가 더해진 곳에는 적군의 예봉이 절로 꺾여 강토가 회복되고 종사가 다시 편안해졌으니, 우리 동방이 오늘에 이른 이유는 작은 것 하나 명나라의 힘 아님이 없지만 정공(鄭公)이 지극한 정성으로 명나라에 호소한 공 또한 어찌 적겠는가. 백년 사이에 상전벽해가 여러번 변하여 명나라가 망했으니, 그간의 사정은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갑신년 봄에 우리 전하께서 명나라가 망한지 한 갑자(甲子)가 지났다는 이유로 더욱 『시경』의 <匪風> <下泉>에서 노래한 망국의 심사가 절실하여 대궐 안에 제단을 마련하고 친히 제사지냈으니, 아! 성대하도다. 그 장차 영원히 천하 후세에 전해질 것이다. 돌아보건대, 공의 후예는 영락(零落)하여 마치 교만한 귀신이 굶주림을 면하지 못하게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천한 저는 가만히 상심됨을 이길 수 없어서 일찍이 한가한 자리에서 그의 제사를 주관할 관리를 배정하자고 감히 주청(奏請)했는데, 임금께서 귀 기울여 듣고 허락했으며 듣는 사람들도 감동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하루는 공의 이손(耳孫) 정건(鄭鍵)이 공의 시문 약간편을 소매에 넣고 와서 나를 보고 말하기를 “집안에 소장된 우리 선조의 글이 흩어져 없어질까 걱정입니다. 그 가운데 병란에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이것 뿐인데, 실로 차마 인몰되어 전하지 않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집이 가난하고 힘이 없어서 간행할 방법이 없으니, 바라건대 그대가 시종 은혜로이 보살펴 주십시오.”라 했다. 나는 두 번 절하고 받아 상고하여 교정을 더했는데, 대사도 김우항(金宇杭)과 영남 방백 홍만조(洪萬朝)가 소문을 듣고 그 일을 도와 곧 인쇄에 붙였다. 그 가운데 과장(科場)에서 지은 글로, 문집에 들일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결같이 거두어 편입한 것은 공이 직접 논급한 글들은 한 글자라도 오히려 귀하게 여길만 하기 때문이다. 또 예(禮)를 논한 글은 혹 헤아려야 할 곳이 없지는 않지만 감히 취사선택할 수 없었던 것은 이미 퇴계 선생의 답장이 있어서 인데, 후학들은 논의하기 어려울것이니 보는 사람은 마땅히 잘 살펴야 할 것이다. 나는 공에게 실로 세상에 드문 느낌을 가지고 있으니, 지금 마침 그릇되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연경에 도착하여 당일 군대를 청하던 길을 말미암아 오랑캐 조정에 폐백을 드리는 행차에 참여했다. 공의 높은 풍모는 그리워해도 이미 아득하여 내 몸을 어루만지며 잠시 북쪽을 바라본다. 천지간에 원통하고 분하여 차라리 살고 싶지 않지만, 다만 이 정자의 눈물을 기울여 동해의 물결로 댈 뿐이다. 아! 슬프다. 숭정기원 82년 기축 맹춘에 숭정대부 판돈녕부사 민진후는 삼가 서문을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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