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문집
서원
누정

 

문집편 -北厓集 -

 

 北厓先生文集序2

凡人家賢人君子 間有而不數 如其莘莘並峙於朞功兄弟之列者 古今罕見 其又繼世莘莘者 更豈非罕見而絶異者乎. 烏川光山氏之世 有後彫 挹淸 山南 養正 雪月諸賢 幷聞道于吾先祖門 卽一堂而君子者. 是五 門闌如彼其焜耀 德義如彼其相維持 而重以紹武承光 厓之北有儒者出 以九峰兄之 與近始溪巖雪厓克齋 偕盛矣. 夫烏川之目之以君子里者 岡老 豈欺我哉. 公以其襲於家庭者 而更立雪巖棲 益拓其址 益廓其聞 今遡而迹之 何莫非學則之爲之本者也. 廬墓兩親喪 六年不一迹於外 溪巖公 稱以行貫金石 此其盡孝於事亡者也. 師門易簀 素食素衣帶 過一朞 際亂離 懼夫遺集之或不保 飛文三院 要其廣傳藏護 以壽斯道 及鋟梓也 鄕議推公爲洞主 公樂心興事 卒底完就. 盖有師無負 吾見於君云者 抑不獨鄭秋巒一人 此其盡誠於先師 而非諸子所能及者也. 干戈七載 社稷傾危 公收募兵糧 文諭一鄕者 激切懇惻 又書方岳 論制勝之策. 其在義陣中 有中宵鳴釰氣橫秋之句 聞有和議也 則又詩云灰廟終天痛 墟都永世讐 凡發於漫詠者 無非憂國憤血 雖杜少陵 何以加此. 此其忠愛之得於情性者也. 慨然於風敎頹廢 倣呂約 而參以師門鄕立罰條及朱子月朝會之規 以盡勸懲之方 此其酌古今之宜 而淑人心厚邦俗者也. 間嘗往來于東皐散翁 甲午以來 便關門自守 此其峻節微意 而有未易與人人道者也. 拈師門要訓 而名曰洗口醒心散 廣濟人壞證 此其傳習之餘 而能以善及人者也. 築室弗告臺傍 圖書四壁 風月雙淸 晩拜祠官 一肅遽歸 此其內自重而外自輕者也. 略數之 有此七美 其不能徧擧者 又豈無之乎. 公姿性溫潤 標致高潔 特其薰陶漸染於父師兄弟之間者 與爲多焉 則魯無君子 斯焉取斯者 於公乎而更驗矣. 詩文之寂寥收拾者 裁不過一糾 然冲淡朴實要 之是君子之言. 野淳於此 竊有感慨者 公家君子 不啻兩世而止爾. 小宰託跡篠簣 操行卓異 雲巖之忠孝正直 濯淸之賦質挺特 有二大賢見稱 厥維根深矣. 自是而更分枝交蔕 至於三葉四葉 而之其衆芳群餲 莫之勝枚 如梅園 龍門 野逸 止齋 如黙齋 迂軒 東里 又如杜門 南澗 松坡 草堂皆君子徒也. 使德業風節 便成一家昭穆相祧之私 吾先祖所謂 襲美聯芳 繩繩然繼作 以世其家者 非惟據當日爲然 亦若燭照於其來后者也. 於虖 休哉. 公仍孫堂儒 抱遺糾 屬余以弁題 烏敢當是寄 又烏敢終無一語. 方喟然起懷於一門君子之蔚如 而樂聞公遺風岓韻 不計著穢之爲僭率 自幸託名之爲榮耀 世之好德之人 亦或有恕余愚 而式其君子里者矣. 公以宣武原從功 贈臺監 號北厓 又號近省齋 其諱某 若表德某 見吾先祖論禮答問書. 眞城 後人 李野淳 謹書.
평범한 집안의 현인군자(賢人君子)는 간혹 있더라도 헤아려지지 않기도 하지만 많은 이들이 나란히 기복(朞服)이나 공복(功服) 1)을 입는 형제의 항렬에 있는 경우는 예나 지금이나 드물게 보이는 일이요 또 대를 이어 많은 이들이 그러한 경우라면 어찌 드물게 보이는 특이한 경우가 아니겠는가. 오천(烏川)의 광산(光山) 김씨는 대대로 후조(後彫)2), 읍청(挹淸)3), 산남(山南)4), 양정(養正)5), 설월(雪月)6) 등 여러 어진이 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모두 우리 선조이신 퇴계 선생의 문하에서 도(道)를 들은, 한 집안의 군자들이었다. 이 다섯 분은 가문의 빛나기가 그처럼 찬란하였으며 덕의(德義)를 그와 같이 서로 유지하더니, 거듭해 뒤를 잇고 광휘를 받들어 언덕 북쪽에 선비가 나오니 구봉(九峰형)7) 이형이며, 근시(近始)8), 계암(溪巖)9), 설애(雪厓)10), 극재(克齋)11)와 더불어 함께 성대하였다. 그런 연유로 오천리(烏川里)를 지목해 군자(君子)의 마을이라고 하는 것이니 강로(岡老)께서 어찌 나를 속였으리오! 공(公)은 가정에서 학문을 이어받고 다시 설암서(雪巖棲)를 세워 더욱 그 터를 열고 더욱 그 견문을 넓혔는데, 지금 거슬러 그 자취를 더듬어 보면 무엇인든 배움이 근본이 되지 않은 일이 없었다. 양친상(兩親喪)에 시묘살이 6년 동안 밖에 한 걸음도 하지 않아 계암(溪巖)공이 행실이 금석(金石)을 뚫을 정도라고 칭찬하였으니, 이것은 그분이 망인(亡人)을 섬김에 효도를 지극하게 한 것이다. 스승이 돌아가시자 음식과 의복을 거칠게 하며 지내기를 1년 넘게 하였으며, 난리(亂離)때에는 선생의 유집(遺集)이 혹 보존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여러 서원에 글을 돌려 널리 전하고 잘 보호하게 하여 사도(斯道)를 오래 이어가게 하였으며, 인쇄할 때에 향리에서 의논해 공을 동주(洞主)로 추대함에 공은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시작해 완전하게 마치었다. 대개 ‘스승에 대해 저버림이 없음을 내가 그대에게서 본다’고 말하는 이가 정추만(鄭秋巒)12) 한 사람 뿐이 아니었으니, 이것은 공이 선사(先師)에 대해 정성을 지극히 한 것으로서 여러 다른 제자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전란(戰亂) 7년에 사직(社稷)이 기울어 위태로워지자 공은 군량미를 모우기 위해 글을 지어 고을 사람들을 깨우침이 격절간측(激切간惻) 하였으며 방악(方岳)에게 적을 제압해 이길 수 있는 방책을 논하기도 하였다. 공이 의로움을 진술한 시에 ‘한 밤중 우는 칼 기운이 가을 하늘을 가로 지르네[中宵鳴인氣橫秋]’라는 구절이 있으며, 화의론(和議론)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는 곧 시에 ‘종묘를 잿더미로 만듦에 하늘 끝까지 애통해 하고 도읍을 폐허로 만듦에 길이 대대로 원수로 삼는다.[灰廟終天通 墟都永世讐]’하였으니, 범연히 읊은 것에도 나라를 근심하는 뜨거운 마음이 아님이 없으니 비록 두소릉(杜少陵)이라 한들 어찌 이에 더하리요! 이것은 공의 충군애국(忠君愛國)이 정성(情性)으로부터 얻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풍교(風敎)가 쇠퇴하여 폐지됨을 개탄하여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본뜨고 사문(師門)의 향립벌조(鄕立罰條)와 주자(朱子)의 월조회지규(月朝會之規)를 참고하여 권선징악의 방법을 극진히 하였으니, 이것은 공이 고금(古今)의 마땅함을 침작하여 인심(人心)을 깨끗이 하고 나라의 풍속을 후덕하게 한 것이다. 간간이 동고산옹(東皐散翁)을 왕래하더니 갑오년(甲午年;1594년) 이후에는 곧 관문을 스스로 지키었으니 이것은 그분의 높은 절개를 알 수 있는 은미한 뜻이 깃들여 있으나 쉬이 사람들에게 말 할 수 없는 바가 있는 부분이다. 사문(師門)의 중요한 가르침을 들어 명명하기를 입을 닦고 마음을 일깨우는 약[洗口醒心散]이라 하고 널리 사람들의 무너진 마음의 증상을 구제하였으니, 이것은 전수 받은 바를 익히던 끝에 선(善)을 남에게까지 미친 것이다. 불고대(弗告臺)옆에 방을 만들어 도서(圖書)로 사방의 벽을 두르고는 풍월(風月)과 더불어 맑게 지내더니 만년에 사관(祠官)에 제수됨에 한 번 숙배(肅拜)를 올리고는 곧 돌아왔으니, 이것은 안을 스스로 중하게 여기고 밖을 가볍게 여기신 일이다. 대략 헤아려 보더라도 이러한 일곱가지 아름다운 점이 있거늘 두루 거론하지 못한 것인들 또 어찌 아름다운 점이 없겠는가! 공은 타고난 성품이 온윤(溫潤)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고결(高潔)하였으며, 특히 부사형제(父師兄弟) 사이에서 훈도를 받아 점진적으로 젖어들어 간 바가 많았으니, ‘노(魯)나라에 군자(君子)가 없었다면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러한 덕(德)을 취했겠느냐?’13)던 공자(孔子)의 말을 공에게서 다시 징험할 수가 있다. 시문(詩文)의 없어진 것들을 수습해 정리해 보니 한 권이 넘지 않으나 충담박실(冲淡朴實)한 것이 ‘군자(君子)의 말’이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내가 이에 대해 속으로 감개(感慨)한 바가 있으니 공 집안의 군자다움은 비단 두 대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소재(小宰)께서 향리에 자취를 기탁하였으나 절조있는 행실이 탁이(卓異)함에 운암(雲巖)14) 이 충효정직(忠孝正直)하고 탁청(濯淸)의 타고난 자질이 매우 뛰어나 두 분의 큰 어진이가 있게 되었다고 일컬어 졌으니 그 근원이 깊은 것이다. 그로부터 다시 가지가 나뉘고 꼭지가 섞여 삼대(三代) 사대(四代)에 이르러서는 여러 꽃들이 많은 향기를 뿜어 내 일일이 이루다 거론할 수 없을 정도이니, 매원(梅園), 용문(龍門), 야일(野逸), 지재(止齋), 묵재(黙齋), 우헌(迂軒), 동리(東里), 두문(杜門), 남간(南澗), 송파(松坡), 초당(草堂) 같은 분들은 모두 군자의 무리들이다. 이렇게 덕업(德業)과 풍절(風節)이 한 집안의 소목(昭穆)처럼 서로 이어져 전유(專有)되어진 점을 두고 우리 선조(先祖)께서 이른 바 ‘거듭된 아름다운 꽃처럼 연결되고 끊임없이 계승되어 그 집안에 대대로 이어지리라’고 하시었으니, 당일에 그러했던 것만을 근거로 하지 않고 또한 그 후대까지 밝게 비추어 보셨던 것이다. 아아! 아름답도다! 공의 잉손(仍孫)인 그 집안의 선비가 유집을 안고 와 나에게 서문을 청하는데, 내 어찌 그러한 부탁을 감당할 수 있으리요 마는 또한 어찌 감히 끝끝내 한 마디 말도 없을 수 있겠는가! 바야흐로 한 가문의 군자 많음에 감탄하며 심회를 일으키고 공의 유풍(遺風)과 높은 풍모들음을 즐거워하여, 저술을 더럽히는 참솔(僭率)한 짓임을 따지지 않고 스스로 다행스럽게 여기며 이름을 기탁하는 영광으로 삼으니 세상의 덕(德)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또한 혹 나의 어리석음을 용서하고 군자리(君子里)를 법식으로 삼음이 있을 지어다. 공께서는 선무원종공(宣武原從功)으로 대감(臺監)으로 증직되었다. 호는 북애(北厓) 또는 근성재(近省齋)이며 휘(諱)는 아무개이고 표덕(表德)은 무엇으로 우리 선조와 예(禮)를 논한 문답서(問答書)에 보인다. 진성(眞城) 후인(後人) 이야순(李野淳) 이야순(李野淳 :1755~1831) 퇴계 선생의 9세손으로 자는 건지(健之)이고 호는 광뢰(廣瀨)임. 은 삼가 쓰노라.
1)기복(朞服)은 조부모(祖父母)나 백숙부모(伯叔父母)의 상을 당하여 1년동안 입는 상복이며 공복(功服)은 대공복(大功服)과 소공복(小功服)으로 나뉘는데 대공복은 종형제(從兄弟)의 상을 당하여 9개월간 입는 상복이며 소공복은 재종형제(再從兄弟)나 외조부모(外祖父母)의 상을 당하여 5개월간 입는 상복이다. 2)김부필(金富弼 : ? ~1578) 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언우(彦遇), 호는 후조당(後 堂)임. 3)김부의(金富儀 : 1525~1582) 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신중(愼仲)임. 4)김부인(金富仁 : 1512~1584)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백영(伯榮)임. 5)김부신(金富信 : 1523~?) 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가행(可行), 호는 양정당(養正堂)임. 6)김부륜(金富倫 : 1532~1599)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자는 돈서(惇敍), 호는 설월당(雪月堂)임. 7)김전(金㙉) 조선 선조때의 학자. 자는 자후(子厚)임. 8)김해(金垓 : 1555~1593)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자는 달원(達遠), 호는 근시재(近始齋)임. 9)김령(金坽 : 1577~1641) 조선중기의 문신. 자는 자준(子峻), 시호는 문정(文貞)임. 10)오환(吳煥 : 1572~?) 조선 선조때 문신. 자는 사휘(士輝)임. 11)신익황(申益幌) 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명중(明仲)임. 12)정지운(鄭之雲 :1509~1561) 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정이(靜而)임. 13)『논어(論語)』,「공야장(公冶長)」편, 제 2장 참조. 14)김연(金緣 : 1487~1544)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자적(子迪), 자유(子裕)임.

 

돌아가기

Copyright ⓒ 2004 국제퇴계학회 대구경북지부(한자박사 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