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厓先生文集序1
聖賢之道 有謂見而知之者 不如聞而知之者之爲尤極其至. 然若自聞而知者言之 則方其心融神會之際 其所以慨然想像而有不同時之恨
其有羡於見而之者 當如何哉. 盖吾人之生於世也 苟及聖賢之時而得見焉 則縱使未必能便有所知 斯誠天下之至幸也. 孟子曰 百世之下 聞者莫不興起 而况於親炙之者乎
彼聖賢者 實千百歲而始一出焉 其遺風餘韻 固遠及於百世之下. 而乃若其盛德光輝之發越動盪 以照臨天下者 莫如當其世之爲尤盛大宣著也. 於斯之時 而有能並世而生
得睹其儀形 得聞其警咳 得承其諄諄之敎 則是豈非千百歲之一遇 而其歡欣感發 鼓舞振作 以期必及其踵武者 容有旣乎. 以此而言 是其人雖不可槩謂見而知者
然其所得之深 決定與不見者大有間矣. 故嘗試觀於孔孟程朱之門 雖其泛泛答問之人愚 則以爲其所得 非徒聞而不見者之所及也 况不止於泛泛答問者乎. 我東退陶夫子
卽所謂千百歲而始一出之大賢也 至今數百載之下 聞之者莫不景仰欽慕 意必如江漢濯而秋陽曝 皜皜乎其不可尙已 而恨不得一望見於當日也. 顧當日及門之諸子乃
得並世而生 相與周旋於函丈之間 而使夫玉色金聲 常接乎耳目 瑞日祥雲 常暎於胸襟 則於是而見而知者 何遽不及於聞而知者. 而凡厥摳衣之先輩 又皆極一時之選
雖其功業文章 或不無差等之可論 而比諸孔孟程朱諸門人 未知誰與誰相侔 然其所以心醉誠服於薰陶誘掖之下 以冀造夫道德閫奧者 必皆過於人遠甚 於乎
是何等天下之至幸也耶. 北厓先生金公 卽陶門諸子之一也 其生質之粹 學問之深 處心之正 制行之高 與夫潔淸之操 洽博之識 所以函丈之所期待 儕流之所推重者
觀於諸先輩挽誄之語 亦可以見其槩矣. 而尤致力於生三死一之義 親歿則廬墓以盡其孝 國難則倡義以效其忠 及其山頹之後 則又於文集校讐剞劂之役 其所以竭誠不懈者
在諸門人爲最. 向使得需於時 而展其所蘊 則出入猷爲 何往不可 而顧其高情雅趣 不欲見屈於世 晩年一命之官 亦暫爲出膺 而旋卽棄去. 惟簞瓢陋巷是樂
圖書林壑是實. 盖高蹈以沒其齒 而未嘗留意於著述 平日詩文之出於不得已酬應者 兵火之餘 散逸殆盡. 今其子孫之收拾如干 以與行狀等附錄 合而編者 僅一卷.
然尋常咳唾之成珠玉 步武之中規矩而從而來 造詣之有大過於人 卽此亦足爲全鼎之一臠 若是乎 其遇大賢而有所得之自別也. 先生之六世孫燮氏 以多聞識稱鄕
一日奉遺集示余 求一言以弁之曰 吾先祖廟食於鄕已久 有不待人之復爲闡揚 而惟是遺集之有序. 古也且將繡之於榟 以行於世 子與吾家 誼旣深矣 盍爲我勉諸.
余亦慕退陶夫子 而常以生晩不及爲恨者也 景先生之得至行有如此焉 旣辭謝不獲 則遂以所感於心者 謹書一二 爲北厓集序. 晉陽 鄭宗魯 謹書. 성현(聖賢)의
도(道)에 대해 직접 보고서 아는 자가 들어서 알아 지극한 경지에 이르른 자보다 못하다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들어서 아는 자의 입장에서
말해보면 심신(心神)이 융회(融會)되는 때를 당하여서는 개연(慨然)히 성현의 모습을 그려보며 시대를 함께 하지 못한 한(恨)스러움을 지니게 될
것이니, 그가 직접 보아서 아는 자를 부러워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기를 참으로 성현이 살았던 시대와 함께 하여 그들을 직접
볼 수 있다고 한다면 설사 반드시 알아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진실로 천하의 지극한 행운일 것이다. 맹자(孟子)가 말하길 ‘백세(百世)의
뒤에서도 그 풍모를 들은 자가 흥기(興起)하지 않는 이가 없거늘 하물며 직접 가까이 하여 그들에게 배운 자임에랴!’1) 하였거니와, 저
성현(聖賢)이라는 분들은 실로 천 백세(千百歲)만에야 비로소 한 번 나오시는 분들로서, 그 유풍여운(遺風餘韻)은 진실로 멀리 백세(百世)의
아래까지 미치고 있다. 그러나 만일 그 성대한 덕(德)의 광휘(光輝)가 발산되어 넘실거리며 천하를 밝게 비추는 것이라고 한다면 살았던 당대에
더욱 성대(盛大)하게 훤히 드러남만한 것이 없는 법이다. 그러한 때에 시대를 같이 해 살면서 그분들의 위의있는 모습을 직접 보고 경계의 말씀을
들으며 자상한 가르침을 받들 수 있다면 이것이 어찌 천 백세 만에야 한 번 만나는 것이 아니겠으며 기쁜 마음으로 감발(感發)되고
고무진작(鼓舞振作)되어 반드시 그 뒤 있기를 기약하는 자가 혹시라도 다함이 있을 것인가! 이러한 점에서 말해 본다면, 그들을 비록 일괄적으로
직접 보아서 아는 자라고 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얻은 바의 깊이는 결정코 직접 보지 못한 자들과는 크게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찍이 공자(孔子), 맹자(孟子), 정자(程子), 주자(朱子)의 문인들을 관찰해 보고는, 비록 범범히 문답(問答)한 사람으로서 어리석다고
하더라도 그가 터득한 바는 그저 듣기만 했을 뿐 직접보지 못한 자들이 미칠 바가 아니라고 여겼었는데, 하물며 단지 범범히 문답한 정도의 사람이
아닌 경우에 있어서랴! 우리 나라의 퇴도(退陶)선생은 바로 이른 바 천 백세만에 한 번 나온다는 위대한 현인[大賢]으로서 수 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분의 풍모를 들은 자로서 우러러 존경하며 흠모하자 않은 이가 없어, 생각하기를 반드시 강한(江漢)으로 씨고 가을 볕으로 쪼인 것
같이 희고 깨끗하여 더할 나위 없다2)고 당일(當日)에 한 번 멀리서나마 보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기고 있다. 그 당시 문하에 있던 여러
제자들을 돌이켜 보면 바로 시대를 같이하여 살며 스승의 가까운 곁에서 서로 주선(周旋)하면서 금옥(金玉)같은 모습과 목소리를 항상 귀와 눈으로
접하게 하고 상서로운 해와 구름같은 그 분의 덕(德)을 항상 가슴속에 비추이게 하였으니 그렇다면 이러한 경우 직접 보아서는 아는 자가 어찌
들어서 아는 자에 미치지 못하리오! 그리고 옷자락을 들어 예의를 표하는 선배들 또한 모두 한 때의 엄선된 이들이니, 비록 공업(功業)과
문장(文章)에서 혹 논의할 만한 차등이 없진 않다 하더라도, 공맹정주(孔孟程朱)의 여러 문인들과 비교해 보면 누가 누구와 서로 비슷한지 알 순
없으나, 교화와 이끌어 가르침에 심취(心醉)하고 진정으로 복종하여 도덕(道德)의 깊숙한 곳에까지 나아가기를 바란 자라면 반드시 모두 남들보다
매우 뛰어났을 것이니, 아아! 이 얼마나 천하의 지극한 행운이었겠는가! 북애(北厓)선생 김(金)공은 바로 퇴도(退陶) 문하 여러 제자분 중의 한
분으로서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학문이 깊으며 마음가짐이 올바르고 행실이 고상하여 깨끗하고 맑은 절조와 두루 넓은 식견을 인정받아 스승의
기대하는 바와 동료들의 추중(推重)하는 바가 되었으니 여러 선배들의 만사(挽詞)와 뇌문(誄文)의 말들을 살펴보면 또한 그 대강을 알 수가 있다.
더욱이 생삼사일지의(生三死一之義)3)에 힘을 쏟아 부친이 돌아 가심에 시묘살이를 하여 그 효도를 다하였고 나라에 병란이 있음에 의병을 일으켜
충성을 바치었고 스승이 돌아가심에 이르러서는 또한 문집을 교정하고 인쇄하는 일에 정성을 다하여 게을리 하지 않은 자로는 여러 문인들 중에
으뜸이었다. 만일 때를 기다려서 온축한 바를 펼칠 수 있었다면 출입(出入)하며 꾀하고 행하는 것이 어디를 가더라도 옳지 않으리요 마는 다만
마음과 뜻이 고아(高雅)하여 세상에 굽히려 하지 않아 만년에 일명지관(一命之官)이 되었으나4) 역시 잠시 나가 받기만 하곤 곧 바로 그만
두었다. 오직 안빈(安貧)한 생활[簞瓢陋巷]을 즐기며 독서와 자연 속의 삶[圖書林壑]을 참되게 하였던 것이다. 고상하게 행동하며 삶을 마쳐
일찍이 저술(著述)에 뜻을 두지 않았으며 평일에 지은 시와 문장도 부득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응답하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전란을 거치며
이리저리 모두 흩어져 버렸다. 지금 그 자손들이 약간을 수습을 하여 행장(行狀) 등을 부록하여 합쳐 편집하니 겨우 한 권이 되었다. 그러나
평상시 하는 말이 주옥(珠玉)을 이루고 걸음걸이가 법도에 맞아 뒤따르니 학문의 조예(造詣)가 남들보다 훨씬 뛰어남을 이것만으로서 또한 충분히
신빙할 수 있으니, 대현(大賢)을 만나 얻은 바에 남다른 바가 있는 것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선생의 6대손인 섭(燮)씨는 문식(聞識)이 많다고
향리에 일컬어지는데, 하루는 유집(遺集)을 받들고 와 나에게 보이며 한 마디 말로 서문 써줄 것을 청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선조께서 향리의
사당에 모셔진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다시 남들이 천양(闡揚)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오직 이 유집(遺集)에 서문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전에 장차
인쇄하여 세상에 간행하려 할 적에 그대는 우리 집안과 우의가 이미 깊으시거늘 어찌하여 우리를 위해 힘쓰지 않으셨습니까?’하였다. 나 역시
퇴도(退陶)선생을 사모하여 항상 늦게 태어나 미치지 못했음을 한스럽게 여기며 선생이 지극한 행운으로 그러한 기회가 있었음을 경하하고 있었고,
이미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질 않아 마침내 마음에 감동되어진 바로 삼가 한 두 가지를 적어 북애집(北厓集)의 서문으로 삼는다. 진양(晋陽)
정종로(鄭宗魯)는 삼가 쓰노라. 1)『맹자(孟子)』,「진심장구하(盡心章句下)」, 제 15장.
2)『맹자(孟子)』,「등문공장구상(騰文公章句上)」, 제 4장. 3) 사람은 세 분에 의해 살게되었으니 바로 아버지, 스승, 임금이 그들이다.
아버지는 나를 낳아주셨고 스승은 나를 가르쳐주었으며 임금은 나를 먹여 주었기 때문에 세 분이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 분들이
돌아가시면 모두 삼년상을 지내는데 임금의 상은 친상(親喪)에 비견된다는 뜻으로 방상(方喪)이라 하고 스승의 상은 상복 없이 마음으로 슬퍼한다고
하여 심상(心喪)이라고 한다. 생삼사일지의(生三死一之義)는 바로 세 분에 의해 살게 되었으니 돌아가시면 모두 상기(喪期)를 3년으로 하는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4)1602년 55세 때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순릉참봉(順陵參奉)에 제수된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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