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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편 -柏巖集 -

 

 栢巖集序

君子之學 本諸彝倫 而發之爲事業 本末兼該而不偏 然後方爲體用之全 然不能無小大輕重之分 故必其篤於根本 而後其見於事功者 有可得而言 使其於大且重者而無取焉 雖有不世之勳 非常之業 亦何足以自列於君子之林哉 栢巖金先生 當穆陵之世 歷敭華顯 論思獻替 固以淸名直道著稱 逮及龍蛇之難 受嶺左安集之命 披荆冒刃 露膽吐肝 激忠義諭禍福 辟守宰 收土丁 儲偫餱糧 調恤兵民 黜陟撫摩之政 捕斬督察之令 巨細畢擧 動合機宜 卒以佐成中興之業 其勞勩事功 焯然有以感天衷而浹民髓 然謂以是而盡先生之蘊則未也 先生嘗守寧越 首訪魯陵 置齋舍 復守戶 祀祭必親 當爲都御史 上萬言疏 惓惓以復讐雪恥伸大義 三致意焉 是以忠於君者而及於陵廟也 先生事母至孝 歸省乞養諸疏 讀之使人流涕 光海追崇私廟 儀節視太廟 先生建議請裁損 遂左貶以去國 是移孝於親者而達於母后也 夫盡瘁於禦難 諸賢之所共 而厲志於嘗膽 先生之所獨 有抗義於廢后之日 淸議之所同 而防微於匹適之初 先生之所獨見 蓋其忠孝之性 鬱然根於中 是以當造次危難之際而爲人之所不敢爲 言人之所不能言 隱然有扶持宇宙之力 則彼功業之著於外 特其緖餘之因事而見者耳 先生早從嘯臯錦溪諸先生學 旣而游退陶夫子之門 得聞君子立身行己之方 雖其資質之美 固有得於天者 而薰陶漸染之功 與爲多焉 然則論先生之事功者 當先求其篤倫之行 欲知其篤倫之行者 又當考其授受淵源之所自 然後可以得其大小本末之具備 徒以一時之功 一事之善 欲以議先生 則亦淺之爲知人也 先生素不喜著述 只有詩文雜著若干卷 自今溯求 無以詳其學問造詣之實 然其言平淡典雅 溫厚簡重 確乎有德之言 而箚疏奏狀之文 辭旨剴切 誠意惻怛 而指陳事情 明白的當 足以感動人主之聽 後世論事之臣 皆可以取法焉 先生從孫正郞公鍌外孫寢郞金公烋 編輯年譜 未及就 後孫前持憲㙔與一二宗人 更加收補 辱命於象靖 以校其舛誤 辭不獲 謹受而卒業 旣而將鋟梓以壽其傳 又辱命於象靖 以識其卷首 辭不獲 謹起而許諾 象靖永嘉人也 蓋受先生奠邑興學之惠 幸以固陋之辭 託名其間 以效區區慕仰之私 第僭越是懼焉 歲壬辰三月下浣 韓山李象靖謹序


君子의 學問이란 모든 彛倫(사람이 행하여야 할 도리)에 根本을 두고 하는 일에서 발현되는 것이니 本末이 兼全一致하고 치우침이 없는 뒤에라야 바야흐로 體用이 온전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大小輕重의 분수가 없을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그 根本을 독실히 한 후, 그 공로가 나타난 사람이라야 가히 이를 취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이니 그에서 트고 중한 것만을 취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세상에서 드문 큰 공훈과 뛰어난 사업을 이룩하였다 하더라도 무엇으로 君子의 반열에 설 수 있음을 자처하고 나설 수 있다고 하겠는가? 栢巖 김선생께서는 선조 때에 모든 요직을 두루 거치시고 國政을 맡은 論思의 직책에 있으면서 임금을 보좌하여 善을 권하고 惡을 못하게 하였으니 진실로 바른 도리를 행하여 淸名이 一世에 드날렸다. 壬辰 癸巳年 의 왜란을 당하여서는 嶺南左道 安集使의 명을 받도 작렬한 난리 속에서도 가시밭 길을 헤쳐가며 肝膽을 토로하여 忠義를 부추기고 화복을 일깨우고 흩어진 수령과 壯丁을 불러모아 잃어버린 땅을 수복하는 一方 軍糧을 비축하여 兵民을 구휼하였다. 관직에 있어서는 무능한 자를 물리치고 유능한 자를 기용하였으며, 백성들을 어루만져 따라오게 하는 정치력을 발휘하였고, 전투에 있어서는 적군의 捕斬과 督察의 令을 시의적절하고 민첩한 대처로서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모든 일을 마무리하여 마침내 中興의 대업을 도와서 이룩하였으니 그 노고와 공훈이 찬연하였도다. 이에 天衷을 감동시켰고, 백성들의 마음속에 젖어들게 하였다. 그러나 이로써 선생의 天職의 재능과 쌓으신 공적을 다 말하였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선생께서는 일찍이 영월군수가 되어 부임하던 날, 먼저 魯山陵을 찾아 참배하고 齋舍를 마련하여 魯山君의 시신을 收葬했던 사람을 찾아 陵墓를 관리하게 하고 세금을 면제해 주었으며, 제사는 반드시 친히 모시었다. 都御史가 되어서는 간절한 정성이 담긴 萬言疏를 올려 복수와 雪恥로서 대의를 역설하는 등 깊이 마음을 쓰셨으니, 이로써 임금에게 쏟으신 충성이 능묘에까지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선생께서는 어머니를 섬기는 효성이 지극하여 歸省乞養의 여러 疏文을 읽어보면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금할 수 없었다. 光海主가 생모를 추숭하여 私廟를 세우고 추존하는 의식과 절차를 太廟와 동등하게 하므로 선생께서는 이를 건의하여 儀節을 간소하게 하도록 청하다가 마침내 좌천되어 조정에서 물리침을 당하였으니 이는 선생께서 지니신 효성이 母后에게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대저 難局을 타개함에는 온갖 정성을 쏟아 마음과 힘을 다한다는 것은 모든 현인들이 같이 하였던 바이나, 뜻을 가다듬고 臥薪嘗膽하였음은 선생이 평소 홀로 지니신 뜻이었고, 仁穆妃를 廢后 하던 날, 모든 淸議가 함께 不義에 항거하였지만 선생께서는 처음부터 이와 같은 기미가 엿보여 미리 막아 보려는 先見을 가졌던 것이다. 이는 대개 忠孝의 성품이 마음속에 왕성하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이로써 창졸간에 위난을 맞을 즈음 남들이 감히 하지 못할 바를 해낼 수 있었으며 남들이 말하지 못할 바를 말하여 은연중에 나라를 부지할 수 있는 힘이 되었은즉 외면을 드러나는 저 공업이야 여사에나 나타날 수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선생께서는 일찍이 朴嘯皐 黃錦溪 두 선생에게 師事하여 학문을 익혔고, 퇴계선생 문하에 들어가서 君子의 立身行己의 도를 닦았다. 비록 그 자질의 훌륭함이 진실로 타고난 천품에서 얻은 것이라 하더라도 퇴계선생 으로부터 받은 薰陶가 함께 하여 더욱 성숙된 보람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즉 선생의 하신 일에 대한 공업을 논하려면 마땅히 먼저 倫氣를 숙독히 하였음을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그 연원된 바를 상고하게 되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며 그렇게 한 후에라야 가히 그 大小本末이 구비되었음을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다. 한갓 일시적인 공업과 하나의 좋은 일만으로 선생을 논하려고 한다면 그 인품을 아는데에는 부족하다 할 것이다. 선생께서는 평소 저술에 힘을 쓰지 않으셨으니 다만 詩文 雜著 약간권이 있을 뿐이다. 이제 그 학문의 조예를 자세하게 溯求할 수는 없으나 그 문사가 평담하면서도 전아하고 온후하면서도 간중하여 확실히 유덕한 군자의 말이었다. 따라서 箚文과 疏文 그리고 奏文과 狀啓 등의 글에서 말의 취지가 매우 적절하고 몹시 슬프면서도 성의가 있었으며 事情을 지적하여 진술함에는 그 내용이 명백하고 정곡을 찔러 임금께서 보고 듣기에 감동을 주는데 족하였으니 후세에 國事를 논하는 신하들은 모두가 가히 본받아야 할 것이다. 선생의 종손 正郞公 鍌 과 外孫 寢郞公 烋가 年譜를 편집하다가 완성을 보지 못하고 후손 前持平 㙔가 한 두 사람의 宗人과 함께 다시 자료를 더 모아 보완하였는데 죄송하면서도 영광스럽게 나 象靖에게 잘못된 부분을 교정하여 달라는 청이 있기에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어내지 못하고 삼가 글을 받아 그 일에 착수한 후, 이미 끝마쳤기에 곧 책으로 출간되어 오래도록 전해지리라 여겼는데, 또 다시 나 象靖에게 죄송스럽고 영광스럽게도 책의 序文을 써 달라는 청을 하기에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어 내지 못하고 삼가 이를 허락하였다. 나는 안동 사람이다. 대개 선생이 거처하신 고을에서 興學의 혜택을 받았었는데 다행스럽게도 고루한 말로서 이름만 내세워 그 사이 구구하게 나 혼자 마음속으로 선생을 앙모하면서 바치오니 아무튼 분수에 넘치는 마음 두려울 뿐이로다 壬辰年 三月 下旬 韓山 李象靖은 삼가 머릿글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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